노씨의 원류







 득성(得姓)
 
흐르는 물은 반드시 그 원천(源泉)이 있고 나무는 그 뿌리가 있으므로 해서 자란다.
사람도 뿌리가 있으니 그 뿌리는 곧 시조(始祖) 이다. 그로부터 자손이 생기고 그 자손(子孫)의 몸에는 선조의 피가 흐르고 있으며 같은 피는 같은 성(姓)을 말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성을 갖게 된다. 또한 춘추전(春秋傳)에 따르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천자(天子)가성을 내린다.”라고 하였고 시전(詩傳)에서도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한 할아버지의 자손(同祖同孫)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의 성은 옛 부터 임금이 어떤 백성에게 특별히 내리거나 그들의 선조(先祖)나 시조(始祖)가 오랫동안 살았던 고장의 이름을 따서 성(姓)을 정하기도 하였다.

우리 노씨(盧氏)는 아득한 옛날 중국의 강(姜)씨였는데 노씨로 창성(創姓)하였다.
그 뿌리(根源)는 매우 오래된 편이지만 다른 성씨에 비하여 그 원류설(原流設)이 비교적 단순하다.
그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상고시대(中國上古時代)에 삼황(三皇)이 있었는데 천황(天皇)은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이고 인황은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지황(地皇)은 황제헌원 이다.

이중 인황(人皇)인 염제신농씨는 중화민국 기원전 5100여년 전에 중국 협서의 화산 신농동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소전국(小典國)의 군주(君主)이고 어머니는 제후(諸侯)인 유교(有敎)의 딸로 이름은 여등(女登)이다. 그는 협서의 강수(姜水)에서 자랐으며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았기에 그 지명을 따서 성(姓)을 강(姜)씨로 하였다고 한다.

염제신농씨는 사람들에게 농사(農事)짓는 법과 약초(藥草)로 병을 고치는 법, 하늘에 제사 지내는 법(祭天法), 오현금(五鉉琴)을 만들어 오락(娛樂)하는 법을 가르치고, 귀장역경과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의술방서(醫術方書) 등을 저술(著述) 하였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 훌륭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숭배(崇拜)를 받았다. 
염제신농씨는 본래 중국의 토착민(土着民)이었으나 그 자손들은 한족(漢族)의 침입을 받아 멸망되고 그 후 강태공의 조상들은 황하(黃河)의 홍수를 다스린 공(功)이 있어 여(呂) 땅을 봉토 받았다.
그 후 태공은 이곳에서 살았고 태공의 이름이 상(尙) 이므로 사람들은 그를 여상(呂尙) 이라고 불렀다.

盧씨의 경우 강태공의 6대손 제(濟) 나라 문공(文公)의 子 고원(高元)의 손자 고혜(高傒)가 벼슬은 정경(正卿)이고 시호(諡號)는 경중(敬中)이며 큰 공훈(功勳)으로 제(濟) 나라 노현(盧縣:지금 중국 산동성 창청현)을 채읍(采邑) 받고 고장의 이름을 따서 성(姓)이 “노(盧)씨”가 되니 우리 노씨의 득성조(得性祖) 이시다.

지금도 중국의 금문도(金門都)에서는 노(盧), 강(姜), 허(許), 여(呂), 고(高)의 다섯 성이 한 핏줄을 이어은 동일 혈계(同一血系)라 하여 동짓날(冬至)에 함께 모여 조상들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다.



발현(發顯)

효 문제는 낙양천도후 496년에 姓族祥定이라는 시책을 실행한바 이 성족분정에 의하면 우리 노씨가 漢族四姓(범양노씨,청하최씨,형량정씨,태원왕씨)의 대표 가문으로서 태성가족(명문갑족)으로 기록되고 있다.

오랫동안 수 많은 나라들로 갈라져서 서로 싸워 오던 중국이 진시황(秦始皇)에 의해 통일이 되고, 盧씨들 중에 제일 먼저 세상에 이름이 나게 된 사람이 노생(盧生)이었는데, 그는 진시황의 명(命)으로 바다 속에 있다는 장생불로약(長生不老藥)을 구하기 위해 500명의 동자(童子)와 동녀(童女)를 데리고 신선(神仙)들이 산다는 곳으로 떠났다고 전해진다.

또한 노오(盧敖)라는 사람은 진시황이 직접 박사(博士)의 벼슬을 내렸던 사람으로, 그도 역시 진시황의 명을 받고 신선을 만나기 위하여 북해(北海)로 떠났다가 진시황의 학정(虐政)을 피하여 하남성(河南省)의 盧씨 마을 서쪽에 숨어 살았다고 하며,  그의 후손들도 당(唐)나라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노오(盧敖)는 비상한 재주가 많아 신선들과 함께 하늘을 올랐다고 하며, 그로 인하여 그가 살던 지방이 유명해져서 노씨현(盧氏縣). 노씨산(盧氏山). 노오동(盧敖洞) 등의 지명(地名)이 생겨 났고, 그를 시조(始祖))로하여 중국의 盧氏들은 범양(汎陽)지방에 살게 되었다. 

한(漢)나라 초엽에 노관(盧綰)이라는 풍현(豊縣)지방 사람은 일찍부터 널리 그 이름이 알려진 인물로서 한 고조(漢 高祖) 유방(劉邦)과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서당(書堂)에서 함께 공부하던 막역(莫逆)하고 다정한 친구사이였다.

한고조가 군사(軍事)를 일으켜 장다(藏茶)를 공격할 때 노관은 한 고조를 보좌(補佐)하는 장군(將軍)이 되어 큰 전공(戰攻)을 세웠고, 그 공으로 연(燕)나라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진희(陳狶)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고조는 노관이 진희와 내통(內通)하여 반란을 꾸민 것으로 의심을 품게 되었고, 노관은 그 해(害)를 피하여 동쪽으로 피난하였으며, 후에 동호(東胡)의 왕으로 추대(推戴) 되었다. 그러나 일년이 조금 지나서 노관은 세상을 떠났고, 그의 후손들이 동북(東北)쪽인 한반도 부근까지 옮겨와 살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국운이 쇠퇴하여 망하여 갈 때에 중국에는 수 많은 군웅(群雄)들이 할거하여 분열이 일어났는데, 이때 후한에 노오(盧敖)의 후손으로 노식(盧植)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 당시 최고의 대학자(大學者)이였으며, 그의 학식(學識)과 학문적 업적은 참으로 위대하였다.  

그는 또한 전쟁터에 나가서도 장수(將帥:中郞將)로서 용맹(勇猛)을 떨치었고, 항상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훌륭한 정치가(政治家)이기도 하였다.
어렸을 때 노식은 대학자였던 마융(馬融)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웠고, 아직 유비(劉備)가 나타나기 이전에 나라의 기둥 이며 훌륭한 재상(宰相)으로서 중국 전체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조조(曹操)도 노식의 훌륭함을 극찬(極讚)하였다 한다.

노식은 중국  盧씨의 중흥조(中興祖)이며,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중국의 정치적, 학문적 발전에 기여하였고, 특히 노식의 8대손인 노양오(盧陽烏), 노민(盧敏), 노창(盧昶), 노상지(盧尙之)의 4형제는 그 명성(名聲)이 중국 전체에 떨치어 “사방 노씨”(四房盧氏)로 불리웠다. 

이외에도 수 많은 노식의 후손들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중국에서 명성을 얻고 있다.

노식은 지금의 우리나라의 성균관(成均館) 대성전(大成殿)에 공자(孔子)와 함께 배향(配享)되어 있었으니 그의 학문적 업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번성기(繁盛期)

수(隋)나라가 망하고 당(唐)나라를 세운 고조(高祖)와 태종(太宗)은 보기 드문 훌륭한 인물이었으므로 그들 주위에 많은 인재(人材)들이 모여 들어 당나라를 중흥(中興)시켰으며, 이때에 盧씨 들도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盧씨들 중에 당나라에서 재상(宰相)을 지낸 사람이 여덞명이나 되었고, 그 밖에도 수 많은 盧씨 들이 높고 낮은 벼슬을 지냈으며, 학문상의 업적과 공헌(貢獻)도 대대로 끊어지질 않아서 명실공히 명문갑족(門閥과 家系가 훌륭한 집안)으로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왕(王), 사(謝), 최(崔)씨 등과 함께 중국 四大姓氏
(또는 王 , 謝, 崔, 李, 鄭씨와 함께 六姓이라고 함)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명문갑족(名文甲族)이기에 황제(皇帝)의 자손들과도 혼인(婚姻)으로 관계를 맺었고, 이름이 높은 벼슬 아치들도 盧씨 집안과 통혼(通婚)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이처럼 盧씨들의 문세(門勢: 가문의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 번성(繁盛)하자 황실(皇室)에서는 盧씨와의 혼인을 금하도록 전국 각지에 칙령(勅令)을 내리기에 이르렀고, 盧씨들에게 내렸던 배명전(陪明錢: 나라에서 내리는 은급<恩給>)도 중지시키기까지 하였다.

당시 盧씨들은 대부분 산동(山東), 하북(河北), 하남(河南), 산서(山西) 지방의 중원지대(중원(中原地帶)에 살면서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당나라 초기에 범양 지방에 살고 있던 노조린(盧照隣)이라는 사람은 학문적 업적이 높아 왕발(王勃), 양형(楊炯), 낙빈왕(駱賓王) 등과 함께 당나라 4걸(四傑)로 손꼽히고 있다. 

당나라 덕종(德宗)때에 십 재자(十才子)의 한 사람으로 노륜(盧綸)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하남(河南)사람이었던 노동(盧仝)은 특히 시문학(詩文學)이 뛰어나서 그가 지었던 수 많은 다가(茶歌)는 오늘날에까지 끊이질 않고 즐겨 불리 우고 있으며 지금도 다 박사(茶 博士)라고 불리우고 있다.

당(唐)나라 때 盧씨 들 중에는 재주가 비상하고 신통한 능력을 가진 이인(異人)들이 많아서 기이(奇異)하고 신비(神秘)로 운 일화(逸話)들을 남기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신의(神醫)라고 불리우는 중국 의술(醫術)의 시조(始祖)인 편작(扁鵲)은 본명(本名)이 노부(盧附)이고, 수(隋)나라 말엽에 신승(神僧)으로 불리 우던 노사(盧師)는 용(龍)을 길들여 하늘을 날았으며, 그가 수도(修道)하던 절이 노사사(盧師寺)인데 연성사(涎聖寺)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지금의 하북성 왕평현(河北省 宛平縣)의 노사산(盧師山)에 현존하고 있다.

불교(佛敎)의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으로 28조(祖)가 되는 중국의 달마조사(達磨祖師)는 중국불교 선(禪)의 1조(祖)이다.

이로부터 선(禪)의 육조(六祖)가 노혜능<盧慧能: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조계혜능대사(曹溪慧能對師)의 선지(禪旨)>이시다.

혜능(慧能: 638~713)은 당나라(618~907) 시대의 선승이며 선종(禪宗)의 제6조이자 남종선(南宗禪)의 시조이다. 
일반적으로 6조대사 또는 조계대사(曹溪大師)라고 하며, 대감선사(大鑑禪師)라고 시호되었다.
 
또 위(魏)나라 무제(武帝) 때에 노녀(盧女)라는 여인(女人)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궁궐을 들어가 황제(皇帝) 앞에서 북을 치고 가야금을 연주할 때 그 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울려 나오는 듯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하며 
당(唐)나라 때 노미랑(盧眉嫏) 이라는 여인은 14세의 나이에 법화경(法華經) 일곱 권에 나오는 글자마다 수를 놓으니 오색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그 여인을 보려고 하자 구름 타고 바다 위를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명나라때 이름이 높았던 명장(名將)으로 노당(盧鐺)과 노상승(盧象昇)이 있었는데 노당은 명나라 중엽에 
왜구(倭寇)가 대규모로 쳐들어오자 바닷가로 유인(誘引)한 다음 단창(單窓)에 1,400여명의 목을 쳤다고 
전해진다. 또 노상승은 명나라 말엽에 여러 차례 왜구를 격퇴한 공(功)으로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오르고
그 명성이 오래도록 후세에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의 노씨(盧氏)들은 제(齊)나라 때 득성(得姓)을 한 이후로 중국의 오랜 역사속에서 수 많은 정승(政丞) 과 대유(大儒)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는 모두 盧씨라는 성(姓)을 가진 사람들의 재능(才能)과 자질(資質) 및 학덕(學德)을 반증(反證)하는 것이다. 


전 세계에 살고 있는 노씨는 개략 1.000만명 정도로 추정되며 중국 인구를 14억으로 추정하면 인구 비례가 0.47%로 약 660만명의 노씨가 중국에 사는 것으로 남부인 광동성에 집중도가 가장 높으며,동남아 일대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필리핀,싱가폴,대만,홍콩 및 베트남 등에도 많이 분포되어 살고 있으며 중국 1.000여 성씨 중 42위에 해당 된다고 한다.


동천(東遷)과 정착(定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동천(東遷)한 수(穗) 할아버지의 세계(世系)는 아직 밝혀진 문헌(文獻)들이 아직 없어 계통적으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고, 다만 우리 선조(先祖)들의 기록들을 참고해 보면, 수(穗) 할아버지의 휘(諱)가 홍표(鴻表)이고 당(唐)나라에서 서주자사(徐州刺史)를 지냈고 아버지 휘(諱) 진순(震順)은 연주자사(兗州刺史)를 지냈다고 한다. 

수(穗) 할아버지는 당(唐)나라 말기의 인물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상호군(上護軍: 군직의 하나.3품)을 겸직(兼職)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을 비롯 왕선지(王仙芝), 주온(朱蘊), 황소(黃巢) 등이 잇따라 난리를 일으켜 당나라는 국운이 기울고 세상이 시끄러워지므로 벼슬하던 사람이나 일반 백성들도 난리를 피하여 여러 곳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특히 반란군(叛亂軍)들은 당나라의 세도가(勢道家)와 높은 벼슬아치들을 무차별 학살(虐殺)하고 약탈(掠奪)하였으므로 명문갑족(名文甲族)으로 이름이 높았던 대부분의 盧氏 들도 할 수 없이 난리를 피하여 금문도(金門島), 안휘(安徽), 강소(江蘇), 강서(江西), 절강(浙江), 복건(福建),서광(西廣), 운남(雲南), 대만(臺灣) 등 동남아(東南亞) 쪽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때 수(穗) 할아버지는 아홉 아들을 거느리고 팔학사(八學士)와 함께 한반도(韓半島)로 동천(東遷)하게 되었는데 그 경로(徑路)에 대하여 두 가지 설(設)이 있다.

노씨 각파문중(盧氏各派門中)의 족보(族譜)와 기타 문헌 등을 살펴보면 육로로 하여 요동반도(遼東半島)를 거쳐 뗏목을 타고 패수(浿水)를 건너 왔다고도 하며, 일설에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평안북도 정주(定州) 능리에 정착하여 잠시 살다가 평안남도 용강(龍岡)의 쌍제촌(雙梯村)으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그 시기는 당(唐)나라 말로 9세기 중엽 무렵이다.



구관봉백(九貫封佰)

우리나라 盧씨의 시조인 수(穗) 할아버지는 쌍제촌(雙梯村)에 정착(定着)하여 살면서 아들 9형제에게 정의롭고 참된 인간이 되도록 교육하였다.

이때가 신라(新羅) 47대 헌안왕(憲安王) 때로서 헌안왕(憲安王)은 동경(東京: 지금의 경주)에서 수(穗) 할아버지를 국빈(國賓)으로 극진히 예우(禮遇)하였다. 

이 무렵 신라도 국운(國運)이 점차 기울어져가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후백제(後百濟)가, 북쪽에서는 태봉(泰封)이, 또 만주지역에서 발해(渤海)가 그칠 사이 없이 신라를 침공하였다. 

국빈 (國賓) 대접을 받고 있던 수(穗) 할아버지는 아들 9형제와 함께 신라의 정치, 경제 및 사회 안정에 기여하고 후백제 및 발해의 침공을 물리치는 등 외우내환(外憂內患)의 신라왕조(新羅王朝)를 안정 하는데 큰 공(功)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신라의 왕실(王室)에서는 이들의 공적(功績)과, 수(穗) 할아버지가 원래 당나라의 명문갑족(名文甲族) 임을 숭앙(崇仰) 하여 아들 아홉 형제에게 각각 읍(邑)을 분봉(分封),  관(貫)으로 봉백(封佰)되니 노씨(盧씨)구관(九貫)의 파조(派祖) 이시다.

長子 구(坵)는 장연백(長淵佰), 次子 지(址)는 풍천백(豊川佰), 三子 증(増)은 연일백(延日佰), 四子 해(垓)는 광주백(光州佰), 五子 오(塢)는 교하백(交河佰), 六子 판(坂)은 평양백(平壤佰), 七子 원(垣)은 곡산백(谷山佰) 八子 곤(坤)은 안강백(安康佰), 九子 만(㙢)은 안동백(安東佰)으로 봉백되었다.

수(穗) 할아버지가 한반도(韓半島)로 이주(移住)하여 정착(定着) 하고 살기 시작한지 1100 여 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나라 盧씨 들은 일근만지(一根萬枝)로 번성(繁盛) 하였고, 기나긴 역사 속에서 높고 낮은 관리(官吏)들과, 충신열사(忠臣烈士), 효자(孝子)와 열녀(烈女), 학자(學者)들을 배출 하였다.

오늘날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중요(重要)한 역할(役割)을 담당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발전(發展)과 번영(繁榮)을 위해서 수 많은 노문(盧門)의 후손(後孫)들이 활동(活動)을 벌이고 있다. 

이 모두 뿌리 깊은 나무의 가지가 무성하고 아름다운 꽃과 알찬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우리 盧氏 들은 모두 한 뿌리임을 깊이 생각하고 모선돈종(慕先敦宗) 하고 자녀교육에 힘써야 할 것 이다.



提供 : 長淵盧氏 大同譜 編纂 委員會
參考文獻 : 중국 성씨 군제유점 및 인구분포(화동사범대학출판사 간) / 동국벌열보(1.680년) / 성족 상정 / 노씨 위적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