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연노씨의 유래




    
    
장연(長淵) 노씨(盧氏)는 황해도 장연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姓氏)로써 파 시조(派 始祖) 노구(盧坵)공(公)은 당(唐)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셨고 신라로 동천(東遷) 하신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 公의 첫째 아들로써 고려시대에 장연백(長淵伯)에 봉해졌다.

장연백(長淵伯) 盧坵 公의 아들 안필(安弼) 公은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거란의 침입을 물리 치는데 공(功)을 세워 연강군(淵康君)에 봉(封)해 졌고  4世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공여(公呂) 公은 일등공신 겸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셨다.

7世 광헌공도(匡憲公徒) 노단(盧旦) 公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예부상서(禮部尙書)와 좌우복야(左右僕射)를 지내고 참지정사(叅知政事)에 이르렀고 1085년(선종3)에 지공거(知貢擧)로 임용 되었다.

1086년 사숙(私塾)을 열어 후진교육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 하였으며, 公의 사후에 국가에서 광헌(匡獻)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이에 따라 문도들도 그의 시호를 따라 광헌공도(匡獻公徒)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는 12 공도(公徒)의 하나인 광헌공도(匡憲公徒)이다.

11세 노영(盧詠) 公 께서는 고려 원종 때 벼슬이 사재시령상국(司宰寺令相國) 이었고 몽고의 병화(兵火)를당하여 평안도 용강에서 남으로 피난, 경북 청도 상당으로 이주(移住) 하여 운문산에 대비암(大庇唵)이라는 정자를 지어 장수지소(藏修之所:책 읽고 학문에 힘쓰는 곳)로 삼고 은거(隱居) 하셨다.

영(詠) 公의 孫子 13世 명신(命臣) 公은 공민왕 때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정승(政丞)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랐고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이는 국주(國柱), 태주(台柱), 성주(誠柱) 公 이며 모두 현달(賢達)하여 창녕, 평양, 괴산의 파향조(派鄕祖)가 되셨다.

첫째 국주(國柱) 公은 고려 공민왕 때 벼슬이 이부판서(吏部判事) 였으며 가환(家患)으로 청도에서 창녕 월미촌으로 이주 하시니 창녕 입향조(入鄕祖) 이시다. 묘소는 경북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선고 묘하단에 계장(繼葬) 되었다. 公의 후손들은 창녕을 비롯하여 전국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둘째 태주(台柱) 公은 벼슬이 호군(護軍)으로 벼슬과 생업(生業) 때문에 평양에 이주하여 평양파 입향조가 되었다. 公의 후손들은 평양을 비롯하여 평안도 등에 살고 있으나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고, 평안남도 대동군 시족면 견지리537번지 뒷산에 파조 묘소가 있다.

6·25동란을 전후하여 월남한 후손들이 10世 부사(副司) 양몽(養蒙) 公의 후예(後裔)와 더불어 강원도 홍천군 서면 대곡리산 181번지 파조(派祖)의 묘소를 설단(設壇) 하여 배향(配享) 하고 있으며 그 후손들은 서울, 경기, 강원, 충청, 부산, 대구 등지에 거주하고, 丁酉(1993)년에 평양파세보(平壤派世譜)를 편찬하였다.

셋째 성주(誠柱) 公은 벼슬이 삼한삼중대광보국(三韓三重大匡輔國) 벽상좌명공신(壁上佐命功臣)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이고 괴산에 이주하여 충북 괴산(槐山) 음성(陰城) 派의 입향조 이시다. 公의 아들 찬(贊) 公은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지내셨으며 公의 손자 영수(英壽) 公은 고려 우왕의 비인 의비(毅妃)의 父로서 1381년 우왕이 근비(謹妃)의 궁인으로 있던 公의 딸을 총애하여 의비로 봉하자 서운부정(書雲副正)에서 대호군(大護軍)이 되었고 公의 부인은 복안택주(福安宅主)가 되었다. 그 후 公은 밀직사(密直司)에 임명되고 위성부원군(威城府院君)에 봉해졌다. 公이 졸(卒)하자 우왕이 술자(術者:천문과 역산의 전문가) 거느리고 행차 하시어 장지를 남교(南校: 고려조 궁중 묘역)에 정해주고 시호(諡號)를 양효(良孝)로 증시(贈諡) 하시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公의 후손들은 괴산을 비롯하여 음성, 진천, 충주, 논산, 김포, 서울 등 각 지역에 살고 있다. 

“ 운하견문록(雲下見聞錄)등의 문헌(文獻)에 의하면 1642년(인조20년) ~ 1742년(영조18년)경에 왕(王)의 재가(裁可)를 받은 소곡서원(蘇谷書院=소곡서당의 전신)이 존치하였으며, 이때 청민공 노변소(盧抃素), 참봉 노침(盧沉), 진사 노홍언(盧弘彦) 3賢을 합향(合享)하다가 서원 철폐령에 의거 중단한 바 있음. ” 

장연백(長淵伯) 구(坵) 公의 후예(後裔)들은 수만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근만지(一根萬枝)로 번성(繁盛) 하였고, 기나긴 역사 속에서 높고 낮은 관리(官吏)들과, 충신열사(忠臣烈士), 효자(孝子)와 열녀(烈女), 학자(學者)들을 배출 하였다.

빛을 남긴 현조(顯祖)는 자료 수집되는 대로 다음과 같이 게재하오니, 선현(先賢)들의 피가 흐르는 후손으로서 깊은 성찰 있기를 바랍니다.

빛을 남긴 현조(顯祖)로는 안필(安弼), 공여(公呂), 희연(希衍), 영절(穎節), 단(旦), 세겸(世謙), 영(詠), 진(縝), 명신(命臣), 국주(國柱), 태주(台柱), 성주(誠柱), 변소(抃素), 침(沉), 홍언(弘彦), 영수(英壽), 귀산(龜山), 기남(基南) 등이며,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명(대민(大敏), 상의(尙義), 상현(尙賢), 상흠(尙欽), 인진(仁瑱), 장(樟), 후설(后卨)이 있다.

 무과 급제자 11명(경징(慶澂), 대욱(大旭), 두만(斗萬), 문기(文琦), 박(璞), 변호(變虎), 수(秀), 원익(元益), 의성(義成), 익후(益厚), 흥용(興龍) 등이 있다.
생원시 합격자 10명(공직(公直), 덕연(德淵), 봉명(鳳鳴), 상흠(尙欽), 수(璲), 여공(汝拱), 여발(汝拔), 잠(潛), 주학(周學), 후설(后卨)과 진사시 합격자 11명(경래(警來), 경열(景烈), 극형(克亨), 대민(大敏), 동식(東植), 성봉(聖鳳), 의석(義錫), 인진(仁瑱), 장(樟), 종건(宗鍵), 종흠(琮欽)이 있다.

고려 왕실과의 인척 관계로는 공민왕 국구(國舅) 진(縝) 부원군(府院君)과 우왕의 비 의비(毅妃) 노씨(盧氏)가 있으며,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로는 태종 후궁 소빈(昭嬪) 노씨(盧氏)가 있다.

提    供 : 長淵盧氏大同譜編纂委員會
參考文獻 : 高麗史 및 麗史提綱, 書院謄錄 및 雲下見聞錄, 昌寧郡縣誌, 長淵盧氏世譜 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