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현조




만취선생(晩翠先生) 노침(盧沉)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8-03 18:55:34       조회수 : 637 파일 :

출생(出生)과 생애(生涯)

()는 경승(景升) ()는 만취(晩翠) 또는 돈옹(遯翁)이다.

 

장연백(長淵) () () 공의 18세손이고 고조부는 청민공(淸敏公) () 변소()이시고, 증조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㕘判) () 신건(信健)이시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조부는 홍문관정판사(弘文館正判事) () 윤희(允禧)이시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㕘議) () 사영(士英)의 장남으로 충언(忠彦), 홍언(弘彦), 방언(邦彦) 삼형제를 두었고 장남 충언(忠彦)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원주판관(原州判官)이요, 차남 홍언(弘彦)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임진왜란 때 창의장군(倡義將軍)으로 대산진(臺山陳) 전투에서 적으로부터 노모를 지키려다 함께 전사(戰死)하여 절효공(節孝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공은 1526(中宗 21)에 출생하여 1591(宣祖 24) 향년 66세로 별세하였다.

 

 

脚註

嘉善大夫 : 조선 시대에 둔 종이품 문무관의 품계

吏曹叅判 : 조선 시대에 이조에 속한 종이품 벼슬

通政大夫 : 조선 시대에 둔 정삼품 문관의 품계

正 判 事 : 조선 시대에 홍문관, 춘추관, 훈련원 둔 정삼품 벼슬

成 均 館 : 고려 조선 시대에, 유학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로 나라의 최고학부

進 士 : 고려 조선 시대에, 과거의 예비 시험인 소과(小科)의 복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준 칭호

시문원문(詩文原文)

창압위암백인두(窓壓危巖百刃頭) 망중연수원여부(望中煙水遠如浮)

천발열수당헌수(千髮列峀當軒修) 일대장천포야류(一帶長川抱野流)

대주감가회전장(對酒酣歌懷轉壯) 등임환괴빈첨추(登臨還傀鬂添秋)

승풍가가횡공학(乘風可駕橫空鶴) 하이소선적벽유(何以蘇仙赤壁遊)

 

시문풀이(詩文飜譯)

백길 높은 바위 들창을 가리 우고 앞을 바라보니

물안개가 저 멀리 떠 있는 것 같다

수없이 작은 쪽빛의 산봉우리와 마주 대하는 추녀가 빼어났고

일대의 긴 내는 들을 감싸고 흐르는구나.

술을 들고 노래 읊으니 장한 뜻을 품었고 정자에 올라 돌아보니

귀밑머리 희끗희끗 헝클어진 머리카락 세월을 더한 것이 부끄럽구나

예쁜 가마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니 학이 하늘을 자유로이 나는 것 같아

어찌 그다지도 소동파 신선의 적벽(赤壁) 놀이와 흡사한가.

 

晩翠亭重建記原文

昌山治西金泉洞之小麓有曰晩翠亭者晩翠盧公諱沉之所築而藏修者也公爲國朝明宗時人嘗從曲流李公學自少不屑擧業專意性理與寒岡鄭先生爲道義交嘗而薦除健元陵參奉不就因築是亭與二弟進士潜典籍浚日處其中講磨以相樂每月朔會鄕人習禮交風彬彬焉嘗與本倅李侯孝男設鄕飮禮於其上因以詩唱酬會而和者甚衆一時傳之爲盛事李侯時有曰文章伯仲盧司馬道學淵源李曲流平生景仰眞儒在出自衙門愧我遊可見其推重意也至今數百年亭且圮矣而鄕人之指點稱道者尙不衰群裔相與謀復舊觀而絀於力未果者久矣後 孫根畢嘗遊海國稍致財貲則慨然曰是不可以有待也吾將圖之往年乃出力而重建之於是闔族其贊之旣成善洪在烈二君就余道其事而請爲文記之詩曰維桑與梓必恭敬止書曰若考作室旣底法厥子不肯堂矧肯構夫祖先之有遺亭而子孫修而復之不敢廢者固出於恭敬之葸堂構之誠而不可以己也自卋燮而人紀壞知而能焉者盖鮮矣况出於一人之獨賢者其事不尤難而其誠不尤至耶是可賀也雖然詩書所稱皆設諭之辞而意實在言外也夫桑梓室堂之在外以猶不敢忽况先世道義風範之大者而可以忽忘之乎晩翠公之遺外聲利隱居樂道者盖深有見於內外輕重之分故有取於范公語而名扁者其旨深矣故其遺風餘韻久而未泯則子孫之所當紹述而不墜者豈不有尤大者存焉乎此而無述則亭宇雖復而有不免於虛矣此又諸盧氏之益加勉勵而余所以爲記而勗地者也

赤巴之歲暮春 花山 權龍鉉 記

 

만취정중건기번역문

창산(昌山) 서쪽 김천동(金泉洞) 나지막한 산기슭에 만취정(晩翠亭)이라는 정자가 있으니 만취 노공 휘() ()께서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기 위해 지은 곳이다.

 

공께서는 조선조 명종(明宗) 때에 일찍이 이곡류(李曲流)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젊어서부터 스스로 공부하고 학업을 닦았으며 과거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性理學)에만 전념하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과 도의(道義)로서 교분을 맺어 종유(從遊)하였다.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만취정에서 두 아우 진사 잠(), 전적(典籍) ()과 함께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가운데 서로를 즐겼으며, 매월 초하루에는 고을 사람들을 모아 예()를 익히게 하고, 아름다운 만남의 풍속을 만들고 다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본 고을 이효남(李孝男) 현감이 참석한 온 고을의 유생(儒生)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연회를 열고 그 위에 술잔을 돌리면서 시를 짓고 시를 노래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한동안 현감과 고을 유생이 함께하는 화목하고 훌륭한 자리가 되었다.

 

이 현감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文章伯仲盧司馬 문장의 으뜸은 노 진사요

道學淵源李曲流 도학의 연원은 이곡류 일세

平生景仰眞儒在 평생 우러러 보는 참 선비가 여기에 있네

自衙門愧我遊可 스스로 아문을 나온 나의 놀이가 부끄럽구나.

 

그 중추(重推)의 뜻을 보건대 지금까지 수백 년이 되어 정수리가 무너졌는데, 향인(鄕人)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오히려 도를 칭송하는 것은 아직도 자손들이 쇠하지 않고, 모두가 옛 모습을 복원하려고 서로 도모하면서도 힘이 모자란다고 한 지 오래되었는데, 후손 근화(根華)는 일찍이 일본으로 가 살다가 우연히 들려 돈 때문에 복원을 못 함을 보고서 개탄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내가 장차 이 일을 도모하겠다고 하였으며, 지난해에 건축비 전액을 부담하여

고쳐 세우니, 이에 모던 일가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만취정(晩翠亭) 복원이 이루어지니, 선홍(善洪), 재열(在烈) 두 분이 나에게 만취정 중건 기문과 공의 도의(道義)와 그 사실의 기술(記述)을 부탁하니,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상()과 재()는 반드시 서로 공경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서경에 이르기를, 만약 집을 짓고 나면 그 자식이 당()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만취정을 자손으로서 새로 고쳐서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면, 감히 폐하지 않는 것은, 자손으로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여 공손(恭遜)히 섬김은 당신(堂神)을 이루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며, 자기에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섭섭해하니, 인륜의 기강이 무너지고 능히 할 수 있는 자는 대개 드물었으니, 하물며 한 사람이 홀로 현자(賢者)를 섬기는 것은 그 일이 더욱 어려운 것이 아니거니와 그 정성이 더욱 지극하지 않은가, 이것을 하례할 만한 것이 비록 그러하나, 시경(詩經)에서 말하는 것은 모두 깨닫고 도모하는데 뜻이 있다고 말씀하였으니, 실천하지 않고 말 밖에 있으니, 상재(桑梓)의 집과 방 밖에 있는 것은 오히려, 감히 소홀히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조상세대의 도의(道義)와 가르침을 본받음이 큰 것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만취공(晩翠公)이 남긴 것은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고 도를 즐긴 것은 대개 깊은 뜻이 있어서 가벼움과 무거움을 구분하고 다스리는 공의 말씀에 취하여 편액(扁額)을 쓴 그 뜻이 깊습니다.

 

그 유풍과 여운이 오래되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면 자손들이 계승하고 준수하여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 어찌 더욱 큰 것이 있지 않겠는가.

1978년 늦은 봄 화산(花山)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 쓰다.

 

晩翠公墓表原文

嶠南之昌寧故有茂才邃學貞操懿行鄉人稱之以晩翠先生而爼豆之者曰長淵盧公諱沉字景昇是也其先出自唐翰林學士穗率九子東來麗朝分封九邑長子坵爲長淵伯因以爲貫世襲簪纓至司宰寺令諱詠南移清道築亭于雲門山麗顯王召以師傳堅臥不起割與所居山川贈以南飛仙鶴入雲門之詩諱旵當麗季見圃隱先生遇竹橋之變入杜門洞我太宗元年旌招戾闕不改素衣抃而不拜上笑曰抃素子因賜名抃素除慶州府尹詠忍負首陽心句而不赴卒贈謚清敏寔公高祖也曾祖諱信健吏曹叅判祖諱允禧經筵記注官考諱士英兵曹叅議妣密陽朴氏以嘉靖丙戌生公于金泉里第幼而穎悟性且至孝晨昏之節不待指敎及就傳讀書無滯礙能屬文明廟丙午年二十一中進士試丁外憂廬墓哀毀踰制制闋兄弟束脩于李曲流某之門專劬性理之學戊申薦拜健元陵叅奉辭以老母在不就構一精舍扁曰晩翠日與羣弟講劘經傳每朔望會鄉人習禮與寒岡鄭先生道契深厚丁亥春知縣來設鄉飮禮禮訖贈詩曰文章伯仲盧司馬道學淵源李曲流平生景仰眞儒在出自衙門愧我遊觀此可槩公文章學業爲交遊所推重也萬曆辛卯享年六十六而卒葬于縣北牛川負震之原配昌原黃氏兵使允武之女墓用衛人禮二男長忠彦判官次弘彦進士壬辰倡義殉節蒙旌褒孫男佐郞㟳判官將仕郞嵱察訪巘通德郞至今十二三世子孫蕃衍殆數十百人日啓洪鳳洪燉洪遠來謂余曰吾先祖墓隧年久陵夷今將修補而更欲樹表願得子之一言不朽吾先徽因以家狀授余嗚乎公之學問行治自足以不朽矣而况當時從遊之所稱詡載在邑誌則徵信於後亦綽綽矣奚用贅爲只以告今與後之樵牧者曰爾無或躑躅於此此乃晩翠盧公之藏云

崇禎 紀元後 五乙巳 義禁府都事 恩津 宋秉珣 書

 

만취공모표번역문

영남의 창녕(昌寧)에 오래전에 재능(才能)이 뛰어나고 깊은 학식과 곧은 절개(節槪)와 좋은 행실(行實)을 갖추시니, 고을 사람들이 만취(晩翠)선생이라 부르면서 제향(祭享)을 모시는 분이 있으니, 장연 노공 휘()는 침()이요. 자는 경승(景昇), 바로 이분을 두고 말한다. 그의 선조는 중국으로부터, 오셨으니 당나라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휘() ()께서 아홉 아들을 거느리고 동으로 오시니 고려조에서 나누어 구읍에 봉하니, 맏아들 구()께서 바로 장연백(長淵伯)이 되고 인하여 관향(貫鄕)이 되었다.

 

대를 이어 높은 벼슬을 물려받아 사재시령(司宰寺令) () ()께서 남쪽의 청도(淸道)로 옮기어 오시어 정자를 운문산(雲門山)에 지었다. 고려 현왕이 사부(師父)로 부르시니 누워서 일어나지 아나하니 살던 곳의 산천(山川)의 땅을 나누어 주고 선학(仙鶴)이 날아 남쪽 운문으로 들어갔다는 남비선학(南飛仙鶴)의 시()를 내리셨다.

 

() ()은 고려 말에 포은(圃隱) 선생을 만나 선죽교(善竹橋)의 난을 함께하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태종(太宗) 원년에 대궐에 부르시니, 소복을 바꾸지 아니하고 읍()만 하고 절하지 않으니, 태종이 웃으며 말하기를 읍만 하고 절하지 아니하니, 변소자(抃素子) 이로다. 그로 인해 노변소(盧抃素)란 이름을 주시고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제수하니, 인부수양심(忍負首陽心)이란 시()를 읊으며 부임하시지 않고 돌아가시니, 청민(淸敏)의 시호(諡號) 내리시니 곧 공의 고조이시다. 증조의 휘()는 신건(信健)이니 이조참판(吏曹叅判)이요. 조부의 휘() 윤희(允禧), 경연기주관(經筵記注官)이요. 아버님 휘()는 사영(士英)이니 병조참의(兵曹叅議). ()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시며 1526(중종 21) 병술년에 김천동 집에서 공을 출생하셨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뛰어나게 슬기롭고 영리하고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새벽부터 늦게까지 때를 가리지 않고 이르러 가르침을 받으니 막히거나 머뭇거림 없이 책을 읽고, 능히 글을 짓더니, 1546(明宗 1) 병오(丙午) 415일 중진사(中進士)에 급제하고,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니 산소 근처에 여막(廬幕)을 짓고 슬픔을 억누르며 삼년상을 마친 후 형제가 이곡류(李曲流)의 가문을 찾아 속수지례(束脩之禮)를 올리고, 성리학(性理學) 공부에 전념하셨다.

 

1548(明宗 3) 무신(戊申)년에 건원릉(健元陵)의 참봉(叅奉)에 천거(薦擧)되었으나 노모가 계시므로 사양하고 나가지 아니하고 한 정자(亭子)를 짓고 편액(扁額) 걸어 이름하여 만취정(晩翠亭)이라 하고 날마다 아우들과 더불어 경전 강론에 힘쓰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예()를 가르쳐 익히게 하였으며,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과 도의(道義)를 맺어 깊고 두터운 관계를 맺었다.

 

1587(宣祖 20) 정해년 봄에 현감이

향음례(鄉飮禮)를 마친 뒤 현감이 시를 선사(膳賜)하여 가로되

文章伯仲盧司馬 문장의 으뜸은 노 진사요

道學淵源李曲流 도학의 연원은 이곡류 일세

平生景仰眞儒在 평생을 우러러 보는 참 선비가 여기에 있네

自衙門愧我遊可 스스로 아문을 나온 나의 놀이가 부끄럽구나.

이를 보아 가히 공께서는 절의(節義)로 문장과 학문을 함께하면서, 추앙받고 존중받으면서, 1591(宣祖 24) 만력(萬曆) 신묘(辛卯)년에 향년(享年) 66세로 돌아가시니, 고을 북쪽 우천리 장삼 언덕에 안장하고 배는 창원황씨(昌原黃氏), 병사(兵使) 황윤무(黃尹武) 공의 따님이시고 묘는 문중 묘원에 안장하였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 충언(忠彦)은 벼슬이 판관(判官)이요.차남 홍언(弘彦)은 진사로 임진란 때 창의(倡義)하여 순절하니, 나라로부터 정표(旌表)를 받았다. 손자 휘() () 좌랑이고, ()와 율()은 장사랑이고, () 찰방이고, ()은 통덕랑(通德郞)이니, 지금까지 십 이삼 세로서 자손들이 번연하여 수십 백인에 이르렀다.

 

하루는 계홍(啓洪) 봉홍(鳳洪) 돈홍(燉洪)이 멀리서 찾아와 나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우리 선조의 묘소가 제법 오래되어 장차 보수하고자 하니 바라건대, 한 글을 얻어서 우리 선조의 훌륭한 행적(行蹟)을 기록하여 전수(傳受)하겠다 하니, 오호라 공의 학문과 행치(行治)를 보고 스스로 넉넉함을 느껴서, 행적을 영원불멸(永遠不滅)하게 함이라, 하물며 당시에 종유(從遊)하던 벗들이 자랑하고 우러러 기리어 말하는 바가 읍지(邑誌)에 실려 있은즉 확실하게 증명되고, 후세 또한 작작(綽綽)이 믿어 줄 것이므로 어찌 다르게 쓸 수 있으리오. 후대의 깨우침을 위해 기록하면서, 다만 나무를 하는 아이와 짐승을 치는 아이에게 말하노니 너희 혹 여기에 머뭇거리거나 밟지 말라 이는 곧 만취(晩翠) 노공(盧公)께서 잠든 곳이니라.

19051월 의금부도사 은진 송병순 지음

 

 

脚註

翰林學士 : 당나라 때에 한림원에 속하여 조칙의 기초를 맡아보던 벼슬

司宰寺令 : 고려 문종 때에 사재시의 으뜸벼슬

記 注 官 : 조선 시대에 춘추관에 속하여 사료가 될 시정을 기록하는 관직

兵曹參議 : 조선 시대에 병조에 속한 정삼품 벼슬

廬 幕 : 무덤 가까이에 지어 놓고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

束脩之禮 : 제자가 되려고 스승을 처음 뵐 때에 드리는 예물

曲 流 : 이황(李滉)의 이칭

健 元 陵 : 조선(朝鮮) 태조(太祖)의 능

鄕 飮 禮 : 고을의 유생(儒生)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던 연회

啓 洪 : 31세 시정공파(연제 송병선, 심석재 송병순 문인)

: 31세 좌랑공파(연제 송병선, 심석재 송병순 문인)

: 31세 좌랑공파(연제 송병선, 심석재 송병순 문인)

宋 秉 珣 :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 우암(尤庵) 시열(宋時烈)세손으로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아 우이며 저서로는 심석재집(心石齋集) 독서만집(讀書漫錄) 학문삼요(學問三要) 사례 축식(四禮祝式) 용학보의(庸學補疑) 주서선류(朱書選類) 등이 있다. 

資料收集編纂委員會

編輯飜譯觀號 圭星

參考文獻長淵盧氏世譜, 昌寧郡誌, 聖學淵源錄, 嶠南樓亭詩集, 昌寧樓亭錄

리스트

노 충언 과 다섯 아들
노봉명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