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현조




통훈대부 원주판관(通訓大夫 原州判官) 忠彦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12-29 06:42:10       조회수 : 1407 파일 : 2323081039_D원주판관[현조]원문.hwp

 출생(出生)과 생애(生涯) 

공의 자는 국필(國弼)이시고 연대 미상 64일 출생하였다. 장연백(長淵伯) () 공의 18세손이고 만취선생(晩翠先生) () () 공의 두 아들 중 장남이시다.

晩翠先生 沉 : ()는 경승(景升) 호는 만취(晩翠돈옹(遯翁), 벼슬은 성균관 진사

이고 이곡류(李曲流퇴도(退陶)로부터 수학(修學)하였다.

 

관직(官職)과 임진왜란(壬辰倭亂)

공께서는 1586(선조 19)에 관찰사를 보좌하는 좌이관(佐貳官)을 거쳐 원주판관(原州判官)에 올랐으며,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아버님의 복상(服喪) 중 왜병들이 부산포에 상륙하고 첨절제사(僉節制使) 정발(鄭撥)과 동래부사(東萊府事) 송상현(宋象賢)이 죽음으로써 싸웠으나, 동래성(東來城)이 함락당함을 보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복상(服喪) 중 임에도 불구하고 임지(任地)인 원주로 돌아가 때마침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온 왕자 순화군(巡和君)을 도왔다.

佐貳官 : 조선 시대에 육조(六曹)의 참판(參判)ㆍ참의(參議)의 일컬음

僉節制使 : 조선 시대에, 각 진영에 둔 종삼품 무관 벼슬로 병마 첨절제사, 수군

첨절제사가 있다.

鄭撥 : 조선 선조 때의 무신(1553~1592).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임진

왜란 때에 부산진 첨절제사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宋象賢 : 조선 선조 때의 문신(1551~1592).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동래 부사로서, 임진왜란 때 남문(南門)에 올라가 싸움을 독려하고 순절하였다.

勤王兵 :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군사

 

세계(世系)구성

슬하(膝下)에 다섯 형제를 두셨으니, 장남은 이조좌랑(吏曹佐郞) () ()이고, 차남은 충주판관공(忠州判官公) () ()이고, 삼남은 사복시정공(司僕寺正公) () ()이고, 넷째 아들은 사헌부집의공(司憲府執義公) () ()이고, 다섯째 아들은 통덕랑공(通德郞公) () ()이다.

형제가 모두 벼슬을 하고 명성과 덕망이 높아져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각각의 세계(世系), 좌랑공파(佐郞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정공파(寺正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로 파() 이루었다.

 

유서번역문(遺書飜譯文)

오직 나의 9대조 사재시령(司宰寺令) () ()께서는 용강(龍岡)으로부터 남쪽 청도(淸道)로 오시어 운문(雲門) 산중에 두 정자(亭子)를 짓고 하나는 절 아래 동쪽 입구에 지어 이름하여 대비암(大庇菴)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절 위쪽 동쪽 입구에 짓고 사리와(謝利窩)라고 부르면서, 한가롭게 스스로 자연을 즐기려 날마다 정자를 오르내리곤 하셨다.

 

상부(詳符) 7년에 입안(立案)되어 비어있는 황폐한 땅을 몸소 다스려 운문동(雲門洞)의 주인이 되셨으며, 13년 경신(庚申)년에 현종(顯宗) 임금께서 덕종(德宗)의 사부로 부르셨으나, 병으로 누워서 일어나지 않고 사양하니 임금께서 깊이 헤아려보았으나 그의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 뜻을 거두고 살던 곳의 산천 사십 리 땅을 베어 사패(賜牌)하여 주고 시()를 지어 가로되

南飛仙鶴入雲門 남쪽으로 선학이 날아 운문에 드니

剩借千峰別有園 수많은 봉우리 빌리고도 또 다른 동산이 있네

淪落當年看斗氣 떠도는 별의 기운 해마다 보니

謾將閒脚躡天根 장차 한가한 다리가 하늘 끝을 밟겠구나

 

지순(至順 3) 신미(辛未)년에 8대조 안강부원군(安康府院君) () ()께서 사패(賜牌) 받은 땅을 차츰 넓혀 일정하게 들판을 개간하여 그 세()를 거둬들여 산각(山閣) 관리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지정(至正 5) 을유(乙酉)년에 7대조 시중(侍中)공 휘 명신(命臣)께서 이러한 모든 사실을 돌의 표면에 상세하게 기록하여 원평(院坪) 길거리에 세우셨고 5대조 청민공(淸敏公) () 변소(抃素)께서 집안의 우환으로 창녕 월미촌으로 옮기셨다.

 

,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8년의 병화(兵火)가 일어났으니, 이후에 종친(宗親)이 다 적의 창과 화살 아래 살아남지 못하고 오직 이 몸만 살아남았구나. 지금 듣자 하니, 원평(院坪) 길거리 비석은 깨뜨려서 산산조각이 나고 대비암(大庇菴)과 사리와(謝利窩) 두 정자는 모두 잿더미로 사라진 것이 아무리 왜구(倭寇)가 일으킨 난리 중에 일어난 일이라고들 하지만 실상(實像)인즉 승도(僧徒)들의 소행이로다.

 

선대(先代)의 사적(事蹟)과 문헌(文憲)은 난리(亂離)에 온 정신이 빠져 있는 틈에 대산(臺山) 왜적들이 도적질하고 난 중에 불타 버렸으니, 이러한 풍파를 말하는 것조차 참담하고 비참하도다. 대저 운문산(雲門山)의 한 그루 나무와 한 줌의 흙마저도 나의 선조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없으며, 선조의 물건이 아닌 것이 없도다. 사리와(謝利窩) 동굴 속 3평 공간은 지금도 황폐하지 않았으되, 대비암(大庇菴) 마을 아래 수백 년 동안 세를 걷던 땅은 나에게 이르러 난리를 겪은 데다 병마저 나서 미처 회복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한을 품고 죽으니, 너희 형제들은 당연(當然)히 운문(雲門) 산각(山閣)을 다시 일으켜서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잃지 말아야 하느니라. 또한 김천동(金泉洞) 만취정(晩翠亭)은 나의 선고(先考)께서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시던 장수지소(藏修之所)이며, 산소 위치와 시문(詩文)이 자세히 읍지(邑誌)에 실려있다.

 

반드시 수긍하여 대대로 따르고 이어질 수 있도록 거듭 모우고 모아서 목적(目的)을 세우고 추진하여 마땅히 다시 일으켜서 복원시켜 주길 부탁하노라. 또 차마 말로 다 수 없는 일이 있으니 나의 막내 숙부 휘() ()께서는 태학주부(太學主簿)로서 북쪽 평안도 중화 북부리로 떠나 계시다가 병환으로 전쟁통에 돌아가셨고, 귀양살이하던 곳의 주인 이숙(李淑)께서 가장(暇葬)하였고 아버지를 따라 북부리로 간 종제(從弟) 달문(達文) 또한 돌아오지 못하고 원통하게 죽었으니 오호통재라 객지의 외로운 고혼(孤魂)은 의지할 사람도 없으니, 말보다 먼저 눈물이 흐르나니, 백골을 거두어 선산 언덕에 옮겨오는 것이 가슴속에 맺힌 숙원(宿願)이로다.

 

난리 후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기에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너희들은 이 아비의 말을 잊지 말고 부자의 유골을 옮겨와 반장(返葬)을 한다면, 내가 죽어도 여한 없으니, 반드시 명심할지어다.

 

                  1622516일 쓰노라

達文 : 태학주부 휘() ()의 아들로 휘() 효언(孝彦)의 아명(兒名)이다.

李淑 : 태학주부공께서 유배 중 공을 도와 준 지인

 

원주판관묘비명번역문

창녕의 수장마을 뒷산 갑좌(甲坐) 언덕은 고 원주판관(原州判官) 장연 노공 휘() 충언(忠彦) 공의 안식처이다. 배는 숙인(淑人) 파평윤(坡平尹氏)이시고, 윤은현(尹殷賢) 공의 따님으로 묘는 합장(合葬)이다.

 

조그만 옛 비석이 있었으나, 벗겨지고 떨어지고 기울어져서 다시 세우기로 선홍(善洪), 재열(在烈), 봉환(鳳煥) 종원이 자손 된 도리로 글을 지어 청하면서 이르기를 우리 조상의 시대에는 아마도 가까스로 절반을 이루었고, 그즈음에는 생년(生年)과 졸년(卒年)을 세보(世譜)에 그 기록을 적고 대대로 이어 왔으나, 병화(兵火)를 여러 번 겪고, 문적(文蹟) 마저 온통 죄다 잃어버리는 상황을 겪으면서 상서로운 조짐을 알지 못하고, 가문에 대대로 전해오든 기록의 소재마저 고증할 수 없고, 단지 일찍 벼슬길에 올라 직분(職分)을 다한 후 늦게 돌아오니 향리에서 갈고닦은 도덕적 의리와 학문을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하는 것이 맞는 말이라고 하면서도 자기는 대충 처신하고 있으니, 이것을 혹 근거로 삼을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먼 세대(世代)가 남긴 발자취와 소통(疏通)하여 굳고 단단하게 받들어야 할 것이다. 이 가르침의 말씀은 비록 간략(簡略)하지만, 일생(一生)을 두고 얻을 수 있으니, 일의 큰 원칙(原則)을 바로 세우는 것은 당연(當然)히 해야 할 일이다.

 

나라의 기운이 밝고 왕성할 시기에 인재(人才)를 등용할 때에는 반드시 재능(才能)을 갖춘 사람을 등용하는데, 공께서는 일찍이 방백(方伯)의 직임(職任)을 맡아 그 임무를 완수(完遂)하였으니, 그 재주와 기량을 넉넉히 알 수가 있다. 명리(名利)의 길은 사람이 쉽게 빠지기 때문에 옛날부터 선비를 따르는 자가 많고 그칠 줄을 모르니, 공께서 문부(文簿)를 살피고 곧바로 물러나 동산언덕으로 돌아오니, 명예(名譽)나 이익(利益)을 탐하지 않고 벼슬을 내려놓고 물러나는 절조가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도의(道義)란 사람으로서 자신을 닦는 것은 세상에 필요한 근본이 되는 것이며, 공께서 덕행(德行)과 재능(才能)으로 실정(實情)을 자세하게 살피니, 그 학문을 바르게 행하는 것이 몸에, 배여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재기(材器)와 지절(志節)이 학문에 뜻을 둔 것이 세 가지인데, 이 세 가지 군자의 도를 갖추었고 공의 재능(才能)이 아우러진 것이니, ()이 공()이 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니. 또 어찌 자세히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논하겠습니까.

 

노씨(盧氏) 선조는 당나라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 ()께서 아홉 아들을 거느리시고 동쪽으로 오셨고, 장자(長子) () ()께서 장연노씨(長淵盧氏) 파의 시조이시다. 이조판서(吏曹判書) () 국주(國柱)께서 처음으로 창녕에 오셨고, 청민공(淸敏公) () ()께서는 고려가 멸망하자 의()를 지키셨고 소곡서원(蘇谷書院)에 받들어 배향하니 공의 5대조이시다. 이조참판(吏曹叅判) () 신건(信健)께서는 고조(高祖)이시고,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 윤희(允禧)께서는 증조(曾祖)이시며, 병조참의(兵曹叅議) () 사영(士英)께서는 조부(祖父)이시며, (叅奉) () ()께서는 선고(先考)이시고, ()는 만취(晩翠)이시다.

 

만취공(晩翠公)께서는 수행(遂行)과 학문(學問)이 당세(當世)의 으뜸으로 소곡서원(蘇谷書院)에 배향하고 있으며, 선비(先妣) 창원황씨(昌原黃氏)께서는 병사(兵事)이신 황윤무(黃允武) 공의 따님이다.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큰아들 휘() ()께서는 이조좌랑(吏曹佐郎)이고, 둘째 아들 휘() ()께서는 충주판관(忠州判官)이고, 셋째 아들 휘() () 사복시정(司僕寺正)이고, 넷째 아들 휘() ()께서는 사헌부집의(司憲府집의(執義))이시고, 막내아들 휘() ()께서는 통덕랑(通德郞)이다. 손자 휘() 극창(克昌)께서는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이며, () 극일(克一)께서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고, () 극후(克後)께서는 참봉(叅奉)이고, () 극흥(克興)과 극형(克亨)께서는 진사(進士)이고, 극신(克新), 극엽(克燁), 극환(克煥), 극도(克道)께서는, 통덕랑(通德郞)이다. 이하 후손은 비명(碑銘)에 새기지 않으며 백성과 사직(社稷)과 문부(文簿)를 살피는 재지(才智)와 기량(器量)을 아직 다하지 못하였으나, 조용하게 물러나 동산언덕에서 만년(晩年)의 절조(節操)를 지키고 도의(道義)를 힘써 닦았음이랴.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상의 믿음을 쌓아온 사람은 그 뒤에 특별히 잘 대우(待遇)하고, 감싸주는 사람이 있노라. 

  19692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 쓰노라.

 

 【

 ◾花山 : 안동(安東)의 옛 지명

 ◾權龍鉉(1899~1988) 호는 추연(推演)이고 경남 합천 출신이다. 연재 송병준 선생의 제자인 각재(角材) 권삼현(權參鉉, 1879~1965) 선생으로부터 

   학습을 받은 율곡 학맥의 마지막 선비

 【資料收集編纂委員會

 編輯飜譯

 【㕘考文獻長淵盧氏世譜, 盧氏偉績史, 昌寧郡誌, 嶠南誌, 昌寧金石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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