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현조




광헌공 상서좌복야 노 단(匡獻公尙書左僕射 盧 旦)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1-11 07:46:14       조회수 : 937 파일 : 2323081034_D광헌공[현조].hwp

출생(出生)과 생애(生涯)

시조(始祖) () ()공의 7세손이며 공의 아홉 아들 중 위수(爲首)이신 장연백(長淵伯) () () 공의 6세손이고 광록대부추밀원사(光祿大夫樞密院使) 밀원군(密院君) 희연(希衍) 공의 손자이며, 고려등공신(高麗一等功臣) 수의교위중랑장(修義校尉中郞將) 영절(穎節) 공의 아들로 처음 이름은 조()이고 본관은 장연(長淵)으로 1027(顯宗18)에 출생하셨다

공께서는 타고난 천성(天性)이 온후(溫厚)하고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글공부에도 남과 달라서 주위의 기대가 매우 컸으며, 문종(文宗 19) 10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어사대시어사(御史臺侍御史)를 시작으로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상서령(尙書令)에 추증(追贈)되어 광헌(匡獻)의 시호(諡號)를 받을 때까지 여러 관직에 오르고 수많은 정치상의의 업적을 남겼으며 또한 사숙(私塾)을 열어 후학을 양성, 학문을 꽃 피우고 1091(宣宗 8) 향년 65세로 별세하셨다.

樞密院使: 고려 때 추밀원의 종이품 벼슬, 헌종(獻宗 1) 1095년에 중추원사(中樞 院使)로 고침

光祿大夫: 고려 문관(文官)의 품계(品階)

修義校尉中郞將: 고려 때 수위교위에 두었던 정오품 무관

御史臺侍御史: 고려(高麗) 때 사헌부 어사대(御史臺)에 속한 종오품 벼슬

尙書都省尙書令: 고려 때 상서성(尙書省)의 종일품 최고 관직

 

문적(文蹟)과 영역(塋域))

대세(代世)가 오래되고 여러 차례의 변란(變亂)을 겪으면서 문헌(文獻)과 문집(文集) 등의 문적(文蹟)이 소실(消失)되고 영역(塋域)마저 실전(失傳)되어 충북 괴산 대덕에 설단(設壇)하여 봉사(奉祀)하던 중 경북 청도 향인(鄕人)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청도의 한 곳에 노정승(盧政丞)의 묘가 있고 주위에 노정승(盧政丞)의 정자 터와 들과 보가 있고 그리고 우물이 있다고 전하여 주는 말에 근거하여 산소를 찾던 중 마침내 1980년도 경북 청도군 원정동 산 119번지 내에서 지석(誌石)이 나타나 그 기록을 살펴보니 공의 묘가 분명하고 역사적인 기록과 일치하므로 여러 종인 들의 심사숙고한 의견과 뜻에 따라 축대를 쌓아 묘역을 조성하여 묘비명(墓碑銘)에 사실을 기록한 후 비를 세우고 산소에 대한 의식과 예를 갖추었다. 이때 일본에 거주하던 공의 26세손 33세 재희(在熙) 종원의 정성을 다하여 바친 헌금으로 묘원을 조성했다.

塋域: 산소

誌石: 무덤의 주인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이름ㆍ생일과 죽은 날ㆍ행적(行蹟)ㆍ무덤의 방향

따위를 적어 무덤 앞에 묻는 널판 돌 또는 도자기 판

在熙: 33세 광헌광의 26세손이고, 사헌부집의공의 12세손이다.

 

년대별 관직(年代別 官職)

1065(文宗 19) 시어사(侍御史): 사헌부 어사대 속한 종오품 관직

1073(文宗 27) 중서사인(中書舍人): 중서문하성에서 간쟁(諫諍)을 맡아보던 종사품 관직

1074(文宗 28) 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 겸 우간의대부(右諫議大): 고려 때 문하성(門下省) 4품 관직

1075(文宗 29) 한림학사(翰林學士): 한림원(翰林院)의 정삼품 관직

1077(文宗 31) 직문하성(直門下省): 문하성(門下省)의 정삼품 관직

1078(文宗 32) 병부상서(兵部尙書): 병부의 정삼품 버금 관직

1080(文宗 34) 예부상서(禮部尙書): 예부의 정삼품 버금 관직

1081(文宗 35) 우복야(右僕射) 겸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翰林學士承旨: 한림원의 정삼품 관직

  右僕射: 상서도성)의 정이품 관직

1085(宣宗 2) 중추원사(中樞院使): 중추원의 종이품 관직

1086(宣宗 3) 상서우복야참지정사(尙書右僕射叅知政事): 문하성의 종이품 관직

1091(宣宗 8)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서도성의 정이품 관직

 

업적(業績)과 사적(史蹟)

1065(文宗 19) 6월 갑오(甲午) 일에 문덕전(文德殿)에 거동하여 진사(秦事)를 복시(覆試)하였는데 시어사(侍御史) 노단(盧旦)이 왕지(王旨)를 거슬렀으므로 왕이 노하여 사람을 시켜 끌어내어 조복(朝服)을 벗기고 묶으려 하니 평장사 최유선(平章事崔惟善)이 앞으로 나아가 신하가 잘못이 있으면 헌사(憲司)에 넘기는 것이 마땅하다 아뢰자, 노여움이 누그러졌으나 마침내 복시(覆試)를 마쳤다. 다만 과거를 열 번을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한 사람만을 뽑아서 이원장(李元長) 5명에게 출신을 은사(恩賜)하고 명경(明經)1명에게는 급제(及第)를 내렸다. [고려사 권 8]

 

1074(文宗 28) 7월 기해(己亥) 에 이징망(李徵望)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삼고 김약진(金若珍)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삼고 노단(盧旦)을 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 겸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삼았다. [고려사 권9]

 

1075(文宗 29) 8월 경인(庚寅) 초하루 날에 개기일식이 일어났고 갑인(甲寅) 일에 노단(盧旦)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고 방오계(方吳桂)를 호부상서(戶部尙書), 조위일(曺爲一)을 섭공부상서(攝工部尙書)로 삼았다. [고려사 권9]

 

1077(文宗 31) 12월 정축(丁丑) 초하루 날에 요나라 검교태전(檢校太傳 양상길(楊祥吉)이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고 탐라국이 특산물을 바쳤다. 을사(乙巳) 일에 김약진(金若珍)을 태자대보(太子大保)로 문정(文正)을 태자소보(太子少保)로 노단(盧旦)을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 삼았다. [고려사 권9]

 

1078(文宗 32) 6월 갑인(甲寅) 일에 송나라의 국신사(國信寺)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한헌(韓憲)과 기거사인(起居舍仁) 진목(陳睦) 등이 예성강에 도착하니, 병부상서(兵部尙書) 노단(盧旦)에게 명하여 연반(筵伴)으로 삼아 서교정(西郊亭)에 보내고, 중추원사(中樞院使) 형부상서(刑部尙書) 김제金梯)를 보내어 또한 연반(筵伴)으로 삼고 이들이 순천관반(順天館伴)에 들어오니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호부상서(戶部尙書) 김양감(金良鑑)과 예부시랑(禮部侍郞) 이양신(李梁臣)을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고려사 권9],[고려사절요]

 

1081(文宗 35) 8월 기미(己未) 일에 서여진(西女眞)의 만두(漫豆)

17명이 전 가족을 인솔하고 귀순하였다. 예빈성(禮賓省)에서 아뢰기를 옛 규정에는 변방(邊方) 주민으로서 일찍이 오랑캐 도적들에게 납치되어 갔다가 고향이 그리워서 스스로 돌아온 자와 송나라 사람으로서 재능이 있는 자 이외에 흑수족(黑水族)이나 여진족(女眞族)은 모두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만두(漫豆) 등도 옛 규정을 준수하여 돌려보내 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예부상서(禮部尙書) 노단(盧旦)이 아뢰기를 만두(漫豆) 등이 비록 무지(無知)하다 할지라도 의리를 중히 여겨서 귀순한 이상 이를 거절할 수 없으므로 그들을 산남 지방의 주와 현에 배치하여 입적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하니 왕이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고려사 권9],[고려사절요]

 

1081(文宗 35) 경진(庚辰) 일에 유홍(柳洪)을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삼고 이의(李顗)를 좌산기상시지중추원사(左散騎常侍知中樞院事)로 삼고 노단(盧旦)을 우복야(右僕射) 한림학사(翰林學士承旨)로 삼고 최사제(崔思齊)를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삼았다. [고려사 권9]

 

1086(宣宗 3) 경술(庚戌) 일에 친히 대묘(大廟)에 체()하고 태조(太祖) 이하의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에게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였다. 계축(癸丑) 일에 노단(盧旦)을 상서좌복야참지정사(尙書左僕射叅知政事)로 삼았다. [고려사 권10]

 

1091(宣宗 8) 7월 임술(壬戌) 일에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辭讓)하고 물러난 상서좌복야참지정사(尙書左僕射叅知政事) 노단(盧旦)이 죽으니 광헌(匡獻)이라는 시호(諡號)를 증시(贈諡)하였다. [고려사 권10]

覆試: 초시에 합격한 사람이 다시 보던 과거 제도

朝服: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의복

憲司: 사헌부의 이칭(異稱)

恩賜: 임금이 내려 줌

左散騎常侍: 문하성에 속한 정삼품 낭사(郎舍) 관직

郎舍: 문하성·첨의부·도첨의사사 등에 딸리어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에 관한 일을맡아 보던 관청

諫諍: 말로써 굳게 간하여 실수를 바로잡고 잘못을 고치게 함

封駁: 글을 올려 그름을 논박함

筵伴: 사신의 접빈을 맡은 직무 

西郊亭: 고려 시대 서쪽 교외에 세웠던 정자의 명칭

 

위민봉사(爲民奉仕)와 외교력(外交力)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의 사적(史籍)에 의하면 공께서는 정사(政事)에 임()함에 제도적 절차를 무시하고 제 생각대로 마구 처단하거나 처리하는 것을 막고, 강직하게 임금에게 충고의 말이나 글을 올리는 소임(所任)을 다하고 학문이 드넓고 자세하고 깊이가 있어 자주 지공거(知貢擧) 천거되어서 인재를 뽑는 선발시험 계획에 참여하고 진사 시험을 보게 하여 인재를 뽑는 논제(論題)공정을 도모하였다. 때로는 송나라의 사은사(謝恩使) 또는 사신(使臣)을 맞이하는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외교에서도 익숙하고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국위를 선양하였으며 서여진(西女眞)의 만두(漫豆) 17인이 가족을 거느리고 투항하러 왔을 때 귀화(歸化)에 대한 예빈성(禮賓省)의 반대에도 사정을 진술하여 간절히 청하여 산남주현(山南州縣)에 정착(定着)하여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공을 세웠다.

知貢擧: 고려(高麗) 과거를 볼 때 문관 중에서 임명된 고시관(考試官)

謝恩使: 나라에 베풀어 준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외국에 보내던 사신(使臣)

接伴使: 사신이 묵는 곳에 임시로 파견되어 사신을 맞아 접대하던 정삼품 이상에서 임명된 관원 

禮賓省: 고려 초기, 국빈(國賓)을 접대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

 

교학(敎學)과 육영(育英)

교학을 육성하고자 사학(私學)을 열어 육영(育英)을 장려(奬勵)하니 책상자(冊箱子)를 짊어지고 다니는 문도(門徒)가 운집(雲集)하니 세칭(世稱) 참정(叅政) 노단(盧旦)의 광헌공도(匡憲公徒)라 했다. 이때 최충(崔沖)의 문헌공도(文憲公徒)와 더불어 광헌공도(匡憲公徒)를 비롯한 십이공도(公徒)를 두고 고려십이공도라 이르며, 이것이 곧 학당(學堂)을 짖고 학도를 모아 학문을 연구하게 하는 사학(私學)의 효시(嚆矢)인 것이다. 연대는 1050~1100년으로 50년간이다. 이같이 높은 학문을 꽃 피우고 훌륭한 학자를 많이 배출(輩出)한 육영사업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빛날 일이다.

 

匡獻長淵盧公墓碑文(광헌장연노공묘비문)

도주(道州)의 원정(元井) 묘강(墓崗)의 언덕에 임좌(壬坐)로 앉은 높다란 옛 묘가 있으니 이는 십이공도(十二公徒)를 이룩한 광헌공(匡獻公) 장연(長淵) 노 선생의 무덤이로다. 노씨(盧氏)는 본래 중국 땅 범양(范陽)의 문벌이 좋은 성씨로 당 선종말(唐宣宗末)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상호군(上護軍) () ()께서 아홉 아들을 거느리고 동래(東來)하여 정주(定州) 능리(菱里)에 이르러 용강(龍岡) 쌍제촌(雙梯村)으로 우거(寓居) 하니 이는 곧 우리나라 노씨의 시조(始祖)이시라, 여덟 아들은 문과급제(文科及第), 막내아들은 진사(進士)이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적을 쫓아 물리치는 공이 크므로 구읍(九邑)을 봉()하니, () ()께서 장연백(長淵伯)이라. 이로써 관향(貫鄕)으로 삼았도다. 이어 휘() 안필(安弼)께서는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거란(契丹)을 쳐서 물리치는 공이 크므로 곧 공의 고조이시고 증조의 휘는 공여(公呂)이시니 예부상서(禮部尙書)이시다. ()의 휘는 희연(希衍)이시니 광록대부추밀원사(光祿大夫樞密院使)로 밀원군(密原君)에 봉하였고, 아버님의 휘는 영절(潁節)이시니 중랑장(中郎將)이시다. 공의 휘는 단()이시니 문종조(文宗朝) 문과(文科)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가 되고 줄곧 중서사인(中書舍人) 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 우간의대부한림학사(右諫議大夫翰林學士) 병부상서(兵部尙書) 예부상서(禮部尙書) 우복야(右僕射) 이르고 선종조(宣宗朝)에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올랐으니 앞뒤의 두 임금을 섬기다가 신미(辛未)에 천수를 다하니 광헌(匡獻)의 시호(諡號)가 내렸도다.

 

세대(世代)가 까마득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병화(兵火)로 문적(文籍)이 남김없이 전부 없어지고, 산소마저 잃어버리니, 괴산(槐山) 대덕(大德)에 설단(設壇) 받들어 모신지가 오래였으나, 지난 경신년 가을에 청도에 사는 노인의 전언으로 청도의 한 곳에 노정승묘(盧政丞墓)와 노정승 들과 보가 있다 하여 창녕의 먼 후손들인 상원(相元), 상숙(相淑), 봉환(鳳煥), 맹환(孟煥), 상술(相述) 등 여러분이 산소를 찾고 무덤을 파보니 산소의 기록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아주 뚜렷하고 역사적인 기록과 다르지 않으니 과연 공의 묘이므로 창녕과 괴산문의 여러 종원이 심사숙고한 의견과 뜻을 함께하여 향불을 피우고 정결히 제사를 지내는 일에 여러 사람의 의견이 하나같이 똑같아 이에 축대를 쌓아 묘역을 조성하고 묘비명(墓碑銘)에 사실을 기록한 후 비를 세우고 산소에 대한 의식과 예를 갖추었다.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공께서는 정사(政事)에 임함에 제도적 절차를 무시하고 제 생각대로 마구 처단하거나 처리하는 것을 막고, 강직하게 임금에게 충고의 말이나 글을 올리는 소임(所任)을 다 하였고, 학문이 드넓고 자세하고 깊이가 있어 자주 지공거(知貢擧) 천거되어서 인재를 뽑는 선발시험 계획에 참여하고 진사 시험을 보게 하여 인재를 뽑는 논제(論題)공정을 도모하려 하였도다. 때로는 송나라의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오고 사신(使臣)을 맞이하는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외교에서도 익숙하고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국위를 선양하였으며 서여진(西女眞)의 만두(漫豆) 등 십칠가구가 가족을 거느리고 투항하였을 때 귀화(歸化)에 대한 예빈성(禮賓省)의 반대에도 사정을 진술하여 간절히 청하여 산남주현(山南州縣)에 정착(定着)하여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공을 세웠다.

 

교육과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힘쓰고자 사학(私學)을 열어 육영(育英)을 장려하니, 타향으로부터 공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책상자를 지고 공부하러 오는 제자가 구름처럼 많이 모여드니,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광헌공도(匡憲公徒) 즉 광헌공의 문하생이라 말하였다.

 

최충(崔沖)의 문헌공도(文憲公徒) 등과 더불어 십이공도(十二公徒)라 하니, 유교(儒敎)의 도의(道義)를 유학자가 감동(感動)되어 떨쳐 일어나고 사람이 지켜야 할 오륜의 도리를 가르치고 이끌어서 착한 길로 인도하는데 이바지한 보람과 업적은 우리나라 교육사에 길이 빛날 일이로다.

 

사전(四傳)하여 휘() ()께서는 용강(龍岡)에서 도주(道州) 상당(上黨)으로 옮아 운문산(雲門山) 산중에 대비암정(大庇菴亭)을 짖고 학문을 전심(專心)으로 힘쓰는 곳으로 삼으매 왕의 사부로 부르심을 받고도 자리에 누운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하니 운문(雲門)의 유순지(由旬地)

소유순(小由旬地)을 사패(賜牌)하고 시()를 내렸도다.

南飛仙鶴入雲門(남비선학입운문) 남으로 선학이 날아 운문에 드니

剩借千峰別有園(잉차천봉별유원) 많은 봉우리를 빌리고도 다른 동산이 있네

淪落當年看斗氣(윤락당년간두기)떠돌아다니는 별 기운을 보니

謾將閒脚躡天根(만장한각섭천근)장차 한가한 다리가 하늘 끝을 밟겠구나

 

이전(二傳)하여 휘() 국주(國柱)께서는 이부판사(吏部判事). 이어 삼남(三男)이니 휘() 변소(抃素)는 조선(朝鮮) 태종(太宗)의 부르심에 소복을 고치지 않고 읍()하며 굽혀 절하지 아니하니 변소자(抃素子)라 함이 옳다 하고 임금이 직접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임명하였으나 이에

보신수일도(保身雖一道) 몸을 보전함은 비록 한 길이나

인부수양심(忍負首陽心) 차마 수양산(首陽山)의 마음을 저버릴 손가

야포한황벽(野圃寒篁碧) 들 밭에 차가운 대숲이 푸르러 나를 기다려

대여불개음(待余不改陰) 그 푸른 그늘을 바꾸지않는구나. 라는 시() 남기고 인 끈을 내어주고 세상을 회피하니 왕께서 공을 칭송하여 청민(淸敏)이라는 추증(追贈)하는 칭호(稱號)를 내렸도다. 

공을 소곡서원(蘇谷書院)에 받들어 배향(配享)하도다.

() 태주(台柱)께서는 호군(護軍)이요, () 성주(誠柱)께서는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그 뒤에 대수(代數)가 먼 자손이 왕성하게 일어나 창녕, 평양외성, 괴산 등지에 흩어져 세거(世居)를 이루니 동방(東方)의 대성(大姓)이라 줄곧 벼슬아치를 배출한 양반 가문으로서 지조와 절개를 지키고 무리 속에 우뚝한 절의사(節義使)가 있었도다.

 

공의 먼 후손 교수(敎授) 정식(禎埴) 벗께서 종의(宗議)로 공의 사적(史蹟)과 전하여 내려오던 말을 모아서 문득 청하니

무문(無文)으로 사()했으나 동문(同門)의 의()와 조상을 숭배하고 문중을 위하는 갸륵하고 아름다운 뜻에 겨워 이에 글 짖고 귀 글로 기리나니

아늑한 묘강(墓崗) 위에 옛 무덤이 새로워라.

오랜 나달 비바람에 임자 없이 버렸더니

야어(野語)로 인연(因緣)하여 임의 유택(幽宅) 밝혀내어

갸륵한 정성(精誠)으로 향연(香煙)이 푸르도다.

아름답게 사신 자취 묻힐 일 바이없고

끼치신 공업(功業) 이야 마루처럼 솟아있어

청사(靑史)에 수를 놓아 별빛으로 빛나리니

옥돌에 이 뜻 새겨 길이길이 전()하리라.

歲戊辰 嘉月 上澣 文學博士 缶林 洪在烋 謹撰

무진년 3월 상순 문학박사 부림 홍재휴 삼가 씀

 ◾道州: 고려 때 청도의 지명 

十二公徒: 고려(高麗) 때 개경(開京)에 있던 열두 사학(私學)

崔沖: 고려 전기의 학자ㆍ문신(984~1068).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ㆍ월 (月圃)ㆍ방회재(放晦齋).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해동공자로 추앙되었다. 문집 최문헌공유고(崔文憲公遺稿)가 전한다.

由旬地: 토지의 이수(里數) 단위 

小由旬地: 40

 

고려십이공도(高麗十二公徒)

명칭(名稱)

설립자

관직

문헌공도(文憲公徒)

최충(崔忠)

시중(侍中)

홍문공도(弘文公徒)

정배걸(鄭倍傑)

시중(侍中)

광헌공도(匡憲公徒)

노단()

참지정사(叅知政事)

  남산도(南山徒)

김상빈(金尙賓)

제주(祭酒)

  서원도(西園徒)

김무체(金無滯)

복야(僕射)

문충공도(文忠公徒)

초경은정(殷鼎

시랑(侍郞)

양신공도(良愼公徒)

김의진(金義珍)

평장사(平章事)

정경공도(貞敬公徒)

황영(黃塋)

평장사(平章事)

충평공도(忠平公徒)

유감(柳監)

시랑(侍郞)

정헌공도(貞憲公徒)

문정(文鼎)

시랑(侍郞)

서시공도(徐侍公徒)

서석(徐碩)

미상(未詳)

  구산도(龜山徒)

미상(未詳)

미상(未詳)

 

資料收集編纂委員會

資料編輯編纂委員會

參考文獻長淵盧氏世譜, 高麗史, 高麗史節要, 列傳, 韓國國史大辭典,韓國儒學史, 撰竝譯文選 第1編 散文篇, 知塘(洪在烋)                      襍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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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인물
통훈대부 원주판관(通訓大夫 原州判官) 忠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