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世系)와 출생(出生)
공은 장연노씨(長淵盧氏) 평양외성파(平壤外城派)의 후예(後裔)로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 때 중정대부(中正大夫) 호군(護軍)으로서 평양외성(平壤外城) 입향조(入鄕祖)이신 14세 태주공(太柱公)의 17세손으로 1902년 1월 22일(陰曆 1901년 12월 13일) 평안남도(平安南道) 중화군(中和郡) 율리면(栗里面) 무진리(戊辰里)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1984년 6월 25일 향년 82세로 선종(善終)하셨다.
◈ 가계구성(家系構成)
공의 고조부께서는 이겸(以謙)이시며, 증조부께서는 순명(順命)이시고 조부(祖父)께서는 천석(天錫)이시며, 아버지께서는 정열(鼎烈)이시다.
정열(鼎烈) 공의 초명(初名)은 성구(成九)이시고 슬하에 큰아들 기동(基東)과 막내아들 기남(基南)을 비롯하여 11남매를 두었으며, 기동(基東)의 후손들이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 성직활동(聖職活動)과 생애(生涯)
세례명은 바오로이고, 1930년 사제서품(司祭敍品)을 받았으며 1942년 교황(敎皇)으로부터 주교(主敎)로 임명된 한국천주교 역사상 한국인 최초의 주교이고, 대주교이시다.
독실한 천주교 가정에서 자란 공께서는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다가 열일곱 살 때인 1917년 서울 용산신학교(龍山神學校)에 입학하였고. 1930년 대신학교(大神學校) 신학부를 졸업하고 사제서품(司祭敍品)을 받고, 서울 명동대성당 보좌신부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1942년 1월 3일 교황(敎皇) 비오(Pius) 12세로부터 한국인 최초의 주교(主敎)로 임명되면서, 제10대 서울 교구장 및 평양·춘천 교구장 서리로 임명받았다.
한 세기 이상 외국인에 의해 관리되던 한국천주교회 역사상 한국인 최초 교구장이 되었지만, 태평양전쟁 말기 때로 일제(日帝)의 탄압이 극심하고 전국 각지에서 외국인 성직자들이 체포·구금되는 상황에서 교회를 지키느라 고심하셨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교회 재건에 힘쓰는 한편, 1946년에는 경향신문(京鄕新聞)을 창간(創刊)하여 반공사상을 고취 시키고, 이승만(李承晩)을 비롯한 우익진영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유엔에서의 승인을 위해 노력하였다. 1950년 유럽 순방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사(公使)가 비어있는 주프랑스 한국공사관(駐佛韓國公使館)으로 달려가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음을 유럽에 알렸고, 귀국 후에는 군종제도(軍從制度)의 도입과 군종신부단 창설에 이바지하였다. 전쟁 직후 유럽과 미국을 여러 차례 순방하면서 외국 민간단체들로부터 많은 원조물자를 들여 받는 등, 전쟁 피해 복구와 해외 유학생 파견 그리고 고아와 빈민 구제 등과 같은 사회복지를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는 자유당 독재정권에 저항하다가 경향신문(京鄕新聞)을 폐간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1962년 교황 요한(Joannes) 23세로부터 한국인 최초의 대주교(大主敎)로 서품(敍品)되었고, 1966년에는 한국 종교인협의회 회장에 피선되셨다.
1967년 3월 27일 교회의 장래를 후진에게 맡기기 위해 서울대교구장직을 사임함과 동시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현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에 있는 성 라자로 마을에서 사회로부터 소외된 나환자들과 함께 지내다가 1984년 6월 25일 선종하셨다. 이토록 공은 성직자로서 교회와 국가 그리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평생 헌신하였다.
◈ 상훈(賞勳)
◾국방부 장관 공로 표창(1958. 11)
◾프랑스 정부 레종도뇌르 최고 문화훈장(1959. 8)
◾대한민국 문화훈장(1963. 8)
◾이탈리아 정부 공로 훈장(1965. 2)
◈ 저서(著書)
◾나의 회상록(回想錄)
◾나의 인생관(人生觀) 당신의 뜻대로
◾명동성당
◾한국천주교회의 대부 노기남 대주교(박도원 저)
【資料收集】編纂委員會
【資料編輯】編纂委員會
【參考文獻】盧基南大主敎, 韓國 敎會史 硏究所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