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현조




자헌대부 청민공 노변소(資憲大夫 淸敏公 盧抃素)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6-06 11:15:41       조회수 : 930 파일 :

출생(出生)과 생애(生涯)

공의 처음 이름은 참()이고 자()회문(繪文)이며, 시조 휘() () 공의 아홉 아들 중 위수(爲首)이신 장연백(長淵伯) () () 14세손이고, 공의 7조는 광헌공(匡獻公) () ()이시고 (高祖) 평안도(平安道) 용강(龍岡)에서 경북 청도(淸道)로 이주한 고려 사재시령(司宰寺) 상국공(相國公) () ()이시며, 증조부(曾祖父)는 공민왕(恭愍王) 국구(國舅) 안강부원군(安康府院君) () ()이시고, 조부(祖父)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정승공(大匡輔國崇祿大夫 政丞公) () 명신(命臣)이시며, 숭록대부 이부판사(崇祿大夫吏部判事) 국주(國柱)께서는 선고(先考)이시다.

 

공께서는 고려 공민왕(恭愍王)과 조선 태종(太宗) 때 사람으로 1380(6) 때 한림원(翰林院) 학사승지(學士承旨)에 올랐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종유(從遊)하였고 선죽교(善竹橋)의 난()에 항거(抗拒)하였다가 경남 창녕군 화왕산 밑 대독산(大犢山)에 은둔(隱遁)한 후 세상에 자신을 들어내지 않고 여생을 보냈다.

   脚註

◾국구(國舅): 왕비(王妃)의 친정(親庭)아버지. 곧 임금의 장인(丈人)

◾정승(政丞): 고려 때 둔 종일품의 으뜸 벼슬 충렬왕 때 시중(侍中)을 고친 것이다

◾한림원(翰林院): 고려 때 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학사승지(學士承旨): 고려 때 한림원·문한서의 정3사림원(詞林院)의 종2품 벼슬

◾정몽주(鄭夢周): 고려 말의 충신(忠臣), 성리학자.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諡 號)는 문충(文忠)이고, 야은(冶隱) 길재(吉再), 목은(牧隱) 연일(延日)과 더 불어 삼은 (三隱)의 한 사람

◾선죽교란(善竹橋亂): 개성에 있는 돌다리로 고려 말기의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철퇴를 맞고 죽임을 당한 변란

◾숭록대부(崇祿大夫): 고려 때  종일품 정이품 문관의 품계

◾이부판사(吏部判事): 고려 때  이부(吏部)의 으뜸 벼슬

◾사재시령(司宰寺令): 사재시의 으뜸벼슬

 

위국충절(爲國忠節)

1401년 태종 원년 왕이 명하여 부르니, 대궐(大闕)에 나아가 소복(素服)을 바꾸지 않고 읍()만 하고 절을 하지 아니하니,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옛 제도를 바꾸지 않았고 읍만 하고 절하지 않으니, 변소자(抃素子) 라고 함이 가하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노변소(盧抃素)라 이름하였으며, 왕이 직접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제수(除授)하니, 이에 출발할 때 시를 지어 가로되

보신수일도(報身雖一道) 몸을 보전함은 비록 한 길이나

인부수양심(忍負首陽心) 차마 수양산(首陽山)의 마음을 저버릴 손가

야포한황벽(野圃寒篁碧) 들 밭에 차가운 대숲이 푸르러

대여불개음(待余不改陰) 나를 기다려 푸른 그늘을 바꾸지않는구나

시(詩)는 대체로 선죽교의 뜻이 담겨있는 내용이고 부임 후 칭병(稱病)으로 사임하고 바로 인 끈을 풀어 놓고 집에 돌아가 둔거(遁居)하였고,왕이 수차례 명하여 불렀으 불사(不仕)하였으니, 향인(鄕人)들이 살아생전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공을 청백리(淸白吏)라 하였으니, 향인들로부터 칭송을 들으면서 여생을 마쳤다.

  【脚註

   ◾인 끈 : 발병부(發兵符) 주머니를 매어 차던, 길고 넓적한 녹피(鹿皮)

   ◾청백리(淸白吏)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는 곧고 깨끗한 관리

 

추증시호(追贈諡號)와 예장(禮葬)

청민공(淸敏公)께서 별세하니 태종(太宗)의 청절(淸節)을 사랑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대호군(大護軍)을 가자(加資)하고 청민(淸敏)의 시호(諡號)를 내려주면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석봉(石封)과 예장(禮葬)으로 나라에서 훌륭하게 장사지내 주었다. 이 석봉(石封) 묘는 둘로 쌓은 장방형석축(長方形石築) 묘로, 묘를 중심으로 묘비(墓碑)와 상석(床石)이 있고 좌우에 한 쌍의 문인석(文人石)이 배치되어 있다.

석봉 묘와 문인석은 고려 시대의 묘에 관한 관습(慣習)이나 제도(制度)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어 경상남도 문화재 기념 제153호로 1996311일 지정 되었다.

 

봉향(奉享)과 자손(子孫)

묘소 근처 소곡서당(蘇谷書堂)에서 받들어 배향(配享)하였고, 정부인(貞夫人)께서는 성산이씨(星山李氏)이며, 창녕 입향조(入鄕祖) 판서(判書) () (愼之)공의 따님이고 묘는 공의 묘소 뒤편 소독산(小犢山) 백호내(白虎內) 손좌(巽坐)이다. 의 아들은 영변부사(寧邊府使)와 이조참판(吏曹叅判)을 지낸 휘() 신건(信健)이고, 손자(孫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춘추관(春秋館),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기주관(記注官), 경연관정판사(經筵官正判事)를 지낸 (윤희(允禧)이며, 증손(曾孫)은 병조참의(兵曹叅議)를 지낸 (사영(士英)이고, 현손(玄孫)은 참봉(叅奉) 만취공(晩翠公(()과 진사(進士) 몽학재공(夢鶴齋公((), (()과 태학주부공(太學主簿公(()이고, 6세손은 원주판관(原州判官)을 지낸 (충언(忠彦)과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홍언(弘彦),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낸 (계언(繼彦)이다.

   脚註

   ◾영변도호부사(寧邊都護府使): 평안북도 영변도호부의 종삼품 관직

   ◾이조판사(吏曹叅判): 이조(吏曹)에 속한 종이품 벼슬로 이조 판서의 아래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선 때 문관의 정삼품 당상관의 품계

   ◾홍문관(弘文館)조선 때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하던 관청으로 옥당(玉堂옥서

   (玉署영각(瀛閣)이라고도 하며,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과 더불어 이른바 언론(言論) 삼사(三司)라 하고, 조선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으로서 정승·판서 등 고위 관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곳을 거쳐 갔으며 구성원은 정1품 영사(領事), 2품 대제학(大提學), 2품 제학(提學), 3

   품부제(副提學) 3품 직제학(直提學), 3품 전한(典翰), 4품 응교(應敎), 4품 부응교(副應敎) 1, 5품 교리(校理), 5품 부교리(副校

   理), 6품 수찬(修撰), 6품 부수찬(副修撰) 2, 7품 박사(博士), 8 품 저작(著作) 1, 9품 정자(正字) 등인데, 삼정승을 비롯하여

   경연청(經筵廳), 춘추관(春秋館) 등의 관원들이 이를 겸직하였다.

   ◾춘추관(春秋館): 조선 때 시정을 기록하는 수행하던 관청으로 개국 당시는 예문·춘추관이라 하다가 1401(태종 1) 예문관과 분리하여 춘추관으로 독립 하였다

    경국대에는 영사(領事)는 정1품 영의정이 겸임, 감사(監事)는 정1품 좌·우의 정이, 지사(知事) 2, 동지사(同知事)는 종2품 각 2, 수찬(修撰官)3, 편수(編修官)은 정3품 또는 종4, 기주관(記注官)은 정·5, 기사관(事官6에서부터 정9품 등을 두었는데, 모두 다른 관청의 관원이 겸임하였.

    ◾記注官 : 조선시대 춘추관(春秋館)에 둔 정·종오품(·從五品) 관직이다

    ◾經筵官判事 : 국왕에게 유교의 경서를 강론하는 등 학문 지도와 치도강론(治道講論) 하고 때로는 국왕과 함께 현안 정치문제도 토의하는 관직이어서 가장 명예

    로운 자리로 여겼고, 그만큼 학문과 인품이 뛰어난 문관을 임명하였으며, 1품 영사, 2 지사, 2품 동지사, 3품 판사 등을 두었는데, 모두      다른관청의 관원이 겸임.

 

淸敏公實紀 題淸敏公事實後原文

天所以爲天地所以爲地人所以爲人萬物所以爲萬物只是一箇眞理而己自存乎人者言之則惟忠於君孝於親是其本心秉彛之大綱也保此則爲人失此則不得爲人此眞理也人孰無初但局乎氣囿乎俗動乎禍福而索然失之者多矣余讀盧氏家乘若淸敏公諱抃素字繪文庶幾乎不失此心者乎家乘曰公初諱旵以勝朝國舅之世相國之孫與圃隱鄭先生同心㕘竹橋之亂仍遯居自靖我 太宗元年旌招戾闕不改素服抃而不拜 上笑曰不變舊章抃而不肯屈謂之抃素子可也因異盧抃素除慶州府尹乃作詩曰保身雖一道忍負首陽心野圃寒篁碧待余不改陰遂解印遯歸卒於家上命加資贈諡後人刻其事與詩于石至今不泐據此求之則公之此心 出於至誠惻恒不咈乎愛之理而無怨惡侮吝之累可知也何其懿也篕自殷人來君我國敎敎化之所由來者遠矣公之遯居自靖即其明夷之時也素服不拜即其罔僕之義也應命來抃即其朝周之跡也詠篁托志即其歟麥之情也而卒之辭俸歸山死而無悔又暗合乎蒙難正志晦迹居荒之權嗚乎聞箕聖之遺風而與起百世之下者豈非公之族耶惜乎一不幸而生丁未季未能展布其所蘊二不幸而躬逢堯舜未得恊贊其新化三不幸而不遭後世之晦翁夫子不能作楚辭集註發明屈三閭憤悶壹欝之心也是以功不記於太常畵不列於雲臺祀不腏於鄕杜以至大夫學師亦不能周知而遍通如是寥寥雖然公之所以爲公初不繫乎遭遇之幸不幸也跡愈晦而德愈彰名愈泯而功愈久千載之下如有讀公之詩論公之世則必有識公之心而爲之悲之者矣其所以樹風敎激懦頑者果何如也盧本范陽大姓唐宣宗末有諱穗率九子東來各有勳閥封君分爲九派長淵伯諱坵實爲大宗十傳至司宰寺令諱詠自龍岡南移于淸道麗顯王召爲儲傳不起環賜雲門山由旬地贈詩曰南飛仙鶴入雲門剩借千峰別有園淪落當年看斗氣謾將閒脚躡天根至今傳爲山中掌故凝之以賀湖陳華也於公爲高祖謂公高祖者寢郞沉號晩翠以學行名世與鄭寒岡李曲流爲師友又其子進士弘彦倭亂倡義將母殉臺山賊義而標之朝家旌其閭此可見公之忠孝秉彝上有所受下有所授而觀人者又不可不幷論其世也公之十四世孫龍奎訪余孔雀山中示以家傳徵余纂輯余辭以拙陋不敢承命竊有感於晦翁課忠責孝之意書其說于後奉勖來人龍奎篤學好禮不憚公難其將有以發揮公之此心者

崇禎 四 壬子日南至 新安 李恒老 謹書 

 

청민공 실기 제청민공 사실후 번역문

하늘이 하늘 된 바와 땅이 땅 된 바와 사람이 사람 된 바와 만물이 만물(萬物) 것은 다만 하나의 도리(道理)요 진리(眞理)일 따름이니, 이에 사람을 두고 말을 한 즉 오직 임금에게 충성(忠誠)하고 어버이에게 효도(孝道)하는 것이 본디의 마음이요. 타고난 천성(天性)을 지키는 기본(基本)이요. 근본(根本)이니, 이를 지키고 유지(維持)하여야 하고 이를 지키면 사람이라 할 것이요. 이것을 잃어버리면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이치(理致). 진리(眞理)인 것이다. 사람이 누가 처음이 없으리오. 다만 삶에 얽매여 세속(世俗)에 휩쓸리고 화복(禍福)만 추구하다 보니 외롭고 쓸쓸함에서 벋어나려는 사람이 많다.

 

내가 노씨(盧氏)의 가승(家乘)을 읽어보니 청민공(淸敏公)의 휘()는 변소(抃素)요 자는 회문(繪文)으로 사람의 심성(心性)을 잃지 않은 분이로다.

 

가승(家乘)에는 공의 처음 이름은 참()이요 고려 왕 국구(國舅)의 증손이고 상국(相國)을 지낸 분의 현손이라 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뜻을 같이하여 선죽교(善竹橋)의 난에 참여하였고 그로 인해 은둔(隱遯)하여 살면서 소신(所信)을 굽히지 않았으면서 스스로 자신을 다스렸다.

 

조선조 태종 원년에 왕이 명하여 부르시니 대궐(大闕)에 나아가 소복(素服)을 바꾸지 않고서 읍()만 하고 절하지 아니하니 임금께서 웃으면서 말하기를 옛 제도를 바꾸지 않았고 읍()만 하고 굽히지 아니하니 변소자(抃素子)라고 함이 가하다고 하고 인하여 노변소(盧抃素)라 이름을 고쳐서 부르게 되었고,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제수(除授)하였으나 이에 시를 지어 가로되

保身雖一道(보신수일도)몸을 보전함은 비록 한 길이나

忍負首陽心(인부수양심)차마 수양산(首陽山)의 마음을 저버릴 손가

野圃寒篁碧(야포한황벽)들 밭에 차가운 대숲이 푸르러

待余不改陰(대여불개음)나를 기다려 푸른 그늘을 바꾸지않는구나

라고 읊으면서 침묵하더니, 드디어 인 끈을 풀어 놓고 숨었고 집에 돌아와 별세하셨다.

 

태종(太宗) 임금이 가자(加資)를 명하고 시호(諡號)를 내려주시니, 그 뒤에 사람들이 그 일과 시()를 비석에 새기어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에 비석(碑石)에 근거하여 구한즉 공의 이 마음은 지극히 정성스럽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나타났으며, 사람의 이치를 어기지 않았으며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았고 뉘우치거나 인색함을 보태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찌 그리 굽히지 않고 당당하고 떳떳할 수가 있으리오. 저 은()나라로부터 우리나라에 온 어진 임금 기자(箕子)는 교화(敎化)로 말미암은 바로 인하여 내력(來歷)이 오래되었다. 공의 둔거자정(遯居自靖) 은둔(隱遯)하여 살면서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니, 곧 기자(箕子)처럼 암군(暗君)을 만나 해()를 입은 때이요. 소복(素服)을 입고절하지 않은 것은 남의 신하가 되지 않는다는 의리이며 명()에 의해서 응하여 왔으나 읍()만 한 것은 주() 나라에서 조회(朝會)하던 발자취요. 대숲을 읊으면서 뜻을 의탁한 것은 조국(祖國)의 멸망을 탄식하며 노래 한 정()이로다. 그래서 마침내 봉록(俸祿)을 사양하고 산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뉘우치지 않았으며 또 난을 당해서도 뜻을 바르게 하였고 자취를 숨겨 황량(荒涼)한 곳에 살면서 권세(權勢)를 묻었으니 슬프도다.

!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을 들으면서 감동되어 백세(百世)를 내려와서 떨쳐 일어났으니, 어찌 공의 겨레요, 일가(一家)가 아니겠는가, 아깝도다. 첫 번째 불행은 정미(丁未) 말기, 좋지 못한 시기에 태어나 마음속에 쌓아둔 뜻을 펴지 못한 것이요. 두 번째 불행은 몸소 요순(堯舜) 같은 분을 만나지 못하여 새로운 교화를 함께할 수 없었음이요. 불행의 세 번째는 후세에 주자(朱子)를 만나지 못한 것이니, 무릇 초사집주(楚辭集註)를 짓지 못하고 삼려대부(三閭大夫)를 이루지 못한 굴원(屈原)의 울분과 오직 한 곳을 지향한 염원(念願)에 울분만 가득하였다. 이로써 공의 백신은 제사하는 태상(太常)에 기록되지 않았으며, 공신의 화상을 걸어두는 운대(雲臺)에 배열되지 못하였고 제사를 향사(鄕社)에서 지내지지 않았으니, 그 때문에 대부(大夫)와 학사(學士)에 이르러서도 주지(周知)될 수 없어서 두루 칭송됨이 이처럼 고요하다. 비록 그렇지만 공께서 공이 된 까닭이 애초에 조우(遭遇)의 행·불행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취는 숨겼어도 덕()이 더욱 알려졌고 이름이 빠져 있어도 남기신 공()은 더욱 오래 하였으니, 천년의 세월이 흘러가도 공의 시를 읽고 공의 세대를 논함이 있을 것인즉 반드시 공의 마음을 읽게 됨으로서, 공을 위해 슬퍼하고 아파할 것이다. 풍속을 세우고 나약하고 완악(頑惡) 한 자를 가르친 것이 과연 어떠한가.

 

노씨(盧氏)는 본디 중국 범양(范陽)의 대성(大姓)으로서 당나라 선종(宣宗) 말에 휘() ()께서 아홉 아들을 거느리고 동으로 왔으니, 각각 나라에 공을 세운 문벌(門閥)이며, ()으로 봉해져 아홉 파()가 되었으며, 장연백(長淵伯) () ()께서 실지로 대종(大宗)이 된 후 10세손 사재시령(司宰寺令) 상국(相國)공 휘() ()에 이르러 용강(龍岡)으로부터 남쪽 청도(淸道)로 옮겨 왔으며, 고려 현왕(顯王)이 불러 태자(太子)의 사부(師傅)로 명() 하였으나 나가지 아니하니, 오히려 운문(雲門)의 유순지(由旬地)를 하사하고 시()를 내려 가로되.

南飛仙鶴入雲門(남비선학입운문) 남으로 선학이 날아 운문에 드니

剩借千峰別有園(잉차천봉별유원) 많은 봉우리를 빌리고도 다른 동산이 있네

淪落當年看斗氣(윤락당년간두기)떠돌아다니는 별 기운을 보니

謾將閒脚躡天根(만장한각섭천근)장차 한가한 다리가 하늘 끝을 밟겠구나

이로서 사부(師傅)산중의 장고(掌故)로 삼으니 하염(賀剡)과 진화(陳華) 비할 수 있다.

공께서 고조(高祖)가 되시니, 공의 현손(玄孫)인 침랑(寢郞)의 휘()는 침()으로 호는 만취(晩翠)이니, 학행(學行)으로써 세상에 그 이름이 높으시고 정한강(鄭寒岡) 이곡류(李曲流)와 더불어 사우(士友)가 되었다. ()공의 둘째 아들 진사(進士) 홍언(弘彦)은 왜란(倭亂)에 창의(倡義)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대산(臺山) 전투에서 순직하니, 적이 의롭다고 표()에 세워 칭찬했고 조정에서 여각(閭閣)을 세워 정려(旌閭)하였으니 이렇게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일은 공의 충효(忠孝) 정신이 위로부터 본을 받고 아래로 계승되니, 보는 이와 듣는 사람으로부터 세간의 화제가 아닐 수 없다.

 

공의 14세손 용규(龍奎)가 나의 공작산중(孔雀山中)을 찾아와 집안의 전기(傳記)를 보이면서 나에게 찬집(纂輯)할 것을 청하니 나는 졸루(拙陋)하다고 사양하였으나 감히 허락을 얻지 못했다. 사사로이 회옹(晦翁)이 충효를 과()하고 책()하는 뜻에 감동됨이 있어 그 말을 글 뒤에 써서 찾아온 사람을 힘쓰게 했다. 용규(龍奎)는 학문을 독실히 하고 예를 좋아하여 그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으니 앞으로 공의 이 정신이 발휘되어서 널리 알리는데 그 뜻을 두었노라.

1852년 동짓날 신안(新安) 이항로(李恒老) 삼가 씀

  脚註

    ◾가승(家乘): 한 집안의 역사적 기록, 족보(族譜), 문집(文集) 따위.

◾가자(加資): 조선 때 정삼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추서(追敍)하거나 추천하는 품계

◾태학(太學): 조선 때 유학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청

◾기자(箕子): ()나라의 성인. 이름은 서여(胥餘). ()나라 무왕(武王)은나라를 멸망 시키자 기자는 동쪽으로 도망하여 조선왕이 되어 조선의 백성들에게·양잠·방직·8조금법 등을 가르쳤다고 함. 고려 중엽 평양에 기자묘(箕子墓) 찾 아 사당을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부터 기자에 대한 숭배 사상이 깊어진 것으로 서 현재 평양에 기자릉(箕子陵사당·비석 등 유적이 있는데, 모두 고 려·조선 시대 에 설치한 것임.

◾요순(堯舜) : 선정(善政)을 베푼 요임금과 순임금을 말하며, 요임금은 중국 고대 전설상의 성제(聖帝)로 오제(五帝)의 한사람.

朱子 : (1130~1200)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이름은 희(),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주자는 존칭이며, 신안(안휘성) 사람으로 주자학(朱子學) 집대성하였다

◾상국(相國): 재상(宰相). 승상(丞相), 삼정승(三政丞)의 별칭

◾정한강(鄭寒岡): 조선 중기 문신 겸 학자인 정구(鄭逑)선생을 일컬음

◾회옹(晦翁): 중국(中國) 남송(南宋)의 철학자(哲學者) 주희(朱熹)의 호

◾졸루(拙陋): 옹졸하고 변변치 아니하다는 뜻으로 자신을 낮추는 뜻

◾사패(賜牌):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공신전 등을 내리고 그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보증해 주거나 신개발지의 개발권을 인정해 주기 위해 국왕이 주는 일종의 공문권(公文權)

◾유순지(由旬地): 토지의 이수(里數) 단위로 대유순(大由旬)·중유순(中由旬)·소유순(小 由旬)의 세 가지로 대유순은 80(), 중유순은 60, 소유순은 40리임

초사집주(楚辭集注):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삼려대부(三閭大夫) 굴원(屈原) 등이 읊었던 시가 모음집

◾대산진전투(臺山陳戰鬪):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에 위치한 임진왜란 때 전투지역

이항로(李恒老): 1792~1868 조선 후기의 유학자(儒學者) 본관은 벽진(碧珍) 는 이술(而述) 는 화서(華書),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저서: 화서집(華書集), 화동사합편강목(華東史合編綱目), 주자대전차의집보 (朱子大全箚疑輯補), 화서아언(華西雅言)

관직: 공조참판(工曹參判), 경연관(經筵官)

 

경주부윤 부임수월과 부임불취 문헌비교

부임수월(赴任數月)

태학주부공(太學主簿公) 유서(遺書

청민공 묘비명

경진보(1820), 병오보(1846), 신유보(1921), 을축보(1925)

부임불취(赴任不就)

제청민공사실후

▷​장연노씨세고, 청민공묘비명

병신보(1956), 병오보(1966), 을축보(1985)

만취공묘표

資料收集編纂委員會

編輯飜譯】觀湖 

參考文獻長淵盧氏世譜, 長淵盧氏世稿, , 嶠南誌, 嶺誌要選, 昌寧郡誌,  聖學淵源錄, 碧珍李氏世譜, 華書集, 肅齊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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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남(盧基南)
빛을 남긴 역대 현조 현황(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