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모록




홍수정 부인(洪壽鼎 夫人) 열여 장연노씨(烈女 長淵盧氏)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9-03 13:45:32       조회수 : 584 파일 :

  열녀노씨(烈女盧氏)

      ()과 효()와 열() 가운데 하나만 행하여도 하늘이 감동하고 사람들이 칭송 하는데 효(孝)와 열()을 갖춘 노씨 부인의 본관은 장연(長淵)으로 판돈녕부사() 제대공(齊公) 휘((龜山)의 예(後裔)로서 조부(祖父)는 가선대부호조참의(嘉善大夫戶曹叅議) 諱 인각(仁珏)이며 가선대부호조참판(嘉善大夫戶曹叅判) 휘() 도흥(道興)과 정부인(貞夫人)의 딸로 1728년(英祖 4)에 태어났다.  노씨부인은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고 겸손과 정숙(貞淑)함이 이를 데 없고 어려서 부터 부모님을 정성으로​ 섬기셨으며 장성하여 남양홍공(南陽洪公) 수정(壽鼎)에게 출가하였다. 수정(壽鼎)는 대이(大而)이며 고려순의보국충신(高麗殉義補國忠臣) 시() 충평공(忠平公

   관정헌선생(灌靜軒先生)의 후손 삼중대광삼사좌사(三重大匡三司左使) 남양군(南陽君) () 十三世孫으로 증조는 諱 형일(亨一)이고 조부는 諱 한명(漢明)이며 아버지는 덕구(德九)로  잠덕(潛德)과 문행(文行)으로 칭송(稱頌) 받든 분들이였다. 노씨부인이 시집온 후 시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길때에 집안 살림은 비록 청빈(淸貧) 하나 시부모님 공양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진심을 다하여 몸소 실천 하였으며 시부모님이 상()을 당하여서는 죽()을 삼년동안 ​먹으며 슬퍼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니 이웃 사람들에게 귀감(龜鑑)이 되었다. 또한 노씨부인의 열행(烈行)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특이(特異)한 것은 1756년 윤() 9월 초 이튿날 이니 이 때 남편의 나이 37세요 부인은 29세라 남편이 우연히 내옹지질(內癰之疾)에 걸리어 여러 달을 누어 있다가 섣달에 이르러서는 아주 위독하여, 백약이 무효(百藥無效)하고 식음(食飮)을 전폐 하여 소생되기 어렵게 되자  구호(求護)할 방책(方策) 전혀 없는 상황이라 다만 천지신명께 빌고 추구(追求) 하기를 그 아픔을 자신이 대신 할 것을 밤낮으로 간절히 애원하고 소원하던 중 홀연(忽然)히 지나다 들어온 노파(老婆)를 보아하니 의원(醫員)이 분명한데 신() 같은지라,  노파(老婆)가 자세히 증세(症勢)를 살편 본 후에  말하기를  산사람 혈육(血肉)을 베어쓰면 가히 효험() 있을 것이란 말을  듣고 흐느껴 울다가 스스로 깨우치고 보니 스스로 가로되 남편의 몸이 나의 몸이요  육() 또한 나의 인육(人肉)이라 나의 살을 베어서 남편을 살리는데 무엇을 주저하리요 하고 스스로 칼을 들어 멧돌에 몸을 기대어 다리살을 베어서 혈육(血肉)을 먹인 즉  아주 작은 양이였는데도 효험()이 있거늘 이 좋은 약제를 알았으니 반드시 두다리의 살점이 다할 때 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다음 날 베어쓰고 그 다음 날  또 베어쓰니 슬프고 장하도다, 손가락 한마디를 베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두 다리를 한번 베는 것도  어렵거늘 여러번이라, 하늘이 감동하고  그  크고도  깊은 뜻을 신명()이 도우셔서 남편의 내옹질환(內癰疾患)이 다시 소생되고 회복하여 부부가 함께 칠순(七旬)을 누렸다. 이와 같은 탁절지행(卓節至行)을 마을과 이웃이 다 지켜보았으니 이에 여러 선비들이 논의하여 글을 올린다는 말을 들은 노씨부인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이되어 그 어버이를 위하여 살을 베는 것도 당연하고 아내가 되어 남편을 위해 살을 베는 것 또한 보통일이라 하였다. 또한 부인은 제가(齊家)를 함에 있어 예도(禮度)를 지켜 몸가짐을 바르게하고 이웃을 사귐에 덕을 베풀고  도리(道理)에 맞게 자식을 가르치며 항상 그 아들 순유(純猷), 찬유(纘猷), 신유(紳猷), 서유()에게 이르기를 사람이 효도와 공경을 다 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도리를 한다 하겠느냐 너희들이 어버이 섬기는 도리는 반듯이 매일 삼시봉양(三時奉養)과 혼정신성(昏定晨省)에  게으러지 말라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부인의 행적이요 실적이니 이를 미루어 볼 때 의행(懿行)과  미적(美蹟)이 고금에 으뜸이요  사람으로서는 가능하지 않는 바이며 천백세(千百世)에 들어보지 못한 일이기에 이후 멀고 가까운 사림(士林) 들이  부인의 현숙하고 고신(苦辛)한 절개를 받들고자 여러차례 글을 올리니 갑년(甲年)에 이르러 임금이 특별히 은전(恩典)을 내리어  1817년(純祖17丁丑之春三月에 정려각(旌閭閣) 세우다. 

  정려각(旌閭閣) 위치(忠淸北道 槐産郡 七星面 松洞里)

  34世 圭星

  【獻】長淵盧氏世譜, 槐山邑誌, 槐山三綱錄, 旌閭閣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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