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모록




태학주부공 (太學主簿公 ) 유서(遺書)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1-18 01:22:54       조회수 : 947 파일 :

생애(生涯)

공의 휘()는 준() 이시고, 벼슬은 태학주부(太學主簿)이였으니, 1535년(中宗 30) 을미년에 태어나 경학(經學)으로 강경과(講經科)에 급제하고 1590년(宣祖 23) 경인년 7월 17일 태학주부(太學主簿)를 제수 받은 후 경인년 10월 6일 밤 신주(神主)를 모시는 전각(殿閣)을 지키는 당직 근무 때 향로(香爐)와 향합(香盒)을 도난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니, 그 책임을 물어 관직이 삭탈되고 평안도(平安道중화읍(中和邑북부리(北府里)에 유배 중 병을 얻어 1593년(宣祖 26) 계사년에 향년 58세로 별세하였고, 묘는 중화읍(中和邑북부리(北府里결산(結山기슭이다 

 

공은 광헌공(匡獻公) ()13세손이며, 청민공(淸敏公) () 변소(抃素)의 현손(玄孫)이요, 이조참판(吏曹參判) () 신건(信健)의 증손(曾孫)이며, 홍문관정판사(弘文館正判事) () 윤희(允禧)의 손자병조참의(兵曹參義) () 사영(士英)의 막내 아들로서 맏형은 참봉(參奉) 만취공(晩翠公) () ()이요. 둘째 형은 진사(進士) 몽학재공(夢鶴齋公) () ()이요. 셋째 형은 항(沆)이다. 

 

아들은 휘() 효언(孝彦)이니, 아명(兒名)은 달문(達文)이다. 공의 지인 이숙(李淑)이 효언(孝彦)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18세

때 장가들게 하니, 광주최씨(廣州崔氏) 길노(吉老)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딸이 장성하여 연안인(延安人) 이숙양(李淑養)과 혼인하여 아들 진후(震厚) 두니, 공의 외손자이고 훗날 공의 유서를 전달한 이명관(李命寬)의 선대조(先代祖)이다.

 

유서(遺書)의 유래(由來)

공께서 귀양살이를 할 때 용사(龍蛇)의 난이 일어나고 난중에 병을 얻으니, 그 병이 점차 깊어져 죽음에 이르자 15931122 일곱 살 된 아들 달문(達文)에게 문중의 내력과 세계(世系), 그리고 선조의 분산(墳山)과 기일(忌日) 등을 기록한 유서(遺書)를 남기고 지인 이숙(李淑)에게 달문(達文)을 부탁하고 돌아가셨고. 아들 달문(達文) 또한 딸 하나를 두고 젊은 나이에 죽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먼 훗날 공의 외손자 진후(震厚)의 후예(後裔)인 이명관(李命寬)이 정시(庭試)를 볼 적에 장연노씨(長淵盧氏)가 있으므로 물어 본즉, 창산(昌山) 지포면(池浦面)에 사는 공의 후예(後裔)임을 알고 문중에 알리니, 종인(宗人)으로 부터 공의 유서(遺書)를 받아서 태학(太學) 상읍례(相揖禮) 자리에서 공의 후손 노상사(盧上舍)에게 전달하였으니, 노상사(盧上舍)는 바로 공의 10세손 도호공(道湖公) 주학(周學)이다. 하늘이 도우시어 태학주부공(太學主簿公)의 한()이 담긴 유서를 300백여년의 세월의 흐른 후 공의 후손들이 맞이하게 되었다. 

 

그동안 장연노씨 가문은 여러 난()을 겪으면서 가승(家乘)을 비롯한 문적(門跡)은 도적질 당하고 소실되어, 보계(譜系)는 끊어지고 분산(墳山) 마저 잃어버렸으니, 후손들이 이를 되찾기 위해 울분을 참으며 각고의 노력을 하였으나 결과를 구하지 못해 한탄 하던 중 공의 유서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세계(世系)를 구성하고 분산(墳山)을 찾았을 뿐만아니라 헤어졌던 일가를 만나서 보책(譜冊) 경진보(庚辰譜)를 발간하였으니, 이 모두가 조상을 숭모(崇慕)하고 후손을 사랑하는 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과 높고 깊은 뜻에서 비롯된 유산(遺産)이므로 우리 후손들은 반드시 그 뜻을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太學主簿 諱 浚 謫在中和7歲達文書原文 

於戱余本長淵氏族僑居嶺以南昌寧邑邑之西池浦里金泉洞即吾父兄故宅也宅之東有一小麓遠呑平挹足以供遊覽之眼界汝之伯父諱沉字景昇中進上仲父諱潛字晦昇中生員文章學行發越當世照耀羣蒙 上之三秊以先蔭拜進士兄 元陵叅奉辭以老母在不赴職乃搆數間精舍於粤小麓名曰晩翠亭東扁以回驢菴西牗扁以夢鶴齋余行在第四年僅弱冠與伯仲兄伯氏丙戌生仲氏己丑講討經傳刮磨旨義余之學可謂日月將就賢父兄敎訓之力人無及焉丁亥春二月旣望邑倅李候來遊爲設酒肴伯氏題曰牕壓危巖百仭頭望中煙水遠如浮千鬟列峀當軒秀一帶長川抱野流對酒酣歌懷轉壯登臨還愧鬂添秋乘風可駕橫空鶴何似蘇仙赤壁遊李候次曰千里湖山入馬頭誰家精舍畵中浮文章伯仲盧司馬道學淵源李曲流居驪江號曲流堂吾兄弟執贄月到風來知意味花開葉落記春秋平生景仰眞儒在出自衙門愧我遊仲氏次曰可笑男兒謾白頭乾坤何處岳陽浮眞工縦愧程朱學奇玩還嫌李杜流地得藏身多水月亭能客膝度春秋箇中自有吾人樂俯仰茫茫出以遊余次曰躡足維何又戴頭飛能戾彼躍能浮搆亭非直多山水講學要將涉活流欲驗箇中之動靜恐催那外也春秋門前徵索惟吾分父老休傳太守遊鄉人某亦次然煩不能悉記越明年余以經學登 殿講科庚寅歲七月十七日除太學主簿十月之初六夜有剟殿簾剔位板盜爐盒之變其時直番官削奪遠竄余之來此州四年于玆平安道中和邑北府里於乎國運克艱局夷匪茹兵燹所及靡有孑遺南土尤被殘傷云骨肉之存亡墳墓之全毀孰爲我傳聞且承伯仲氏喪訃以來痛纒髓骨病漸難醫命若弱縷雖在平世運柩於千六百里之程未易事也目今道路險阻人煙冷掃吾未免絶域之暴骨那忍言那忍言汝以一塊血肉安保其必生而四顧客地靡所投抵此村李淑與吾年甲待吾甚厚亦有急人之義必不背棄汝也吾死之日於斯依憑待汝成長此婢順今汝母早殀之後乳養汝者也吾之來携汝挈婢勢不得相離而賴以供衣服飮食則汝當視之以母渠亦待之猶汝之視矣李君活汝之赤佛此婢鞠汝之慈母庶可保覆巢之卵而無乃㽕顚木之孽乎幸至成立尋向故土訪汝從晜季之去處以説乃爺之寃債將去一坏土朽骨埋于先壠之側則再生之榮蔑以加矣從昆季即忠彦弘彦邦彦繼彦宗文也如或宗親全沒於亂則汝當卜築舊址以奉先祀人子之重保門戶也派系所自來先

山所在處爲汝大略言矣吾之先中國人也以范陽嘉族鳴於天下充滿唐朝德宗嫌其位高才傑宗族強盛使人不得與盧結婚故天下謂之山東禁族宣宗末諱穗率九子渡江接于定州菱里再寓龍岡雙梯村九子皆登科忠事麗朝有攘斥之功分封於九邑長淵伯諱坵乃吾中始祖也逮至中葉北土騷亂人多殺傷司宰寺令諱詠南移於清道上黨里作亭於雲門山中新院坪名之曰大庇菴南北有曲窩一則逍遙軒一則養眞堂將有修藏之志而自新院上中下坪至金亭坪皆是閒曠之地故公文立案自作己物顯王召以德王師傳辭以病棄偃臥不起王割與所居山川賜詩曰南飛仙鶴入雲門剩借千峰別有園淪落當年看斗氣謾將閒脚躡天根其後公之子安康府院君諱縝漸斥厥土擧成鈞原付大庇菴而使緇徒守護堂宇府院君之子諱命臣以恭愍朝元輔遯歸井勿亦山閣往往遊賞於大庇菴而摠錄事寶於碑文立於院坪路傍大槩則前面書以祥符七年甲寅立案而十三年庚申賜牌之由後而書以至順三年辛未開墾因付齋僧而至正五年乙酉立碑之事則經亂之後菴之有無碑之存拔亦何以知之寺令公墳山在於邑後五里許松亭坤坐之原配清風金氏墓繼葬奴朴七發守護相公墳山在於大谷村前卯坐之原配延日鄭氏墓同壠子諱國柱以家患移寓於昌寧月未村卒返葬於清道父子繼葬奴崔承奉守護寺令公以下墳山在於井村上黨前後主案而善山府使傍親家禁義守護則汝當往見而清道宗人之奔避存沒亦不可知吾之表從居豐角縣曾經咸安郡守汝亦訪朴咸安家以續根派則清道墳山爲汝詳指幸勿忘也相公孫諱旵仕於麗末與其亂於竹橋鄭圃隱死時因遯居不求聞達 太宗元年命招闕下不改素服抃而不肯拜 上笑曰不變舊章抃而不欲屈謂之抃素子可也因以盧抃素除慶州府尹臨發詩曰保身雖一道忍負首陽心野圃寒篁碧待余不改隂赴任數月稱病解歸仍爲易名改字繪文卒於家加大護軍 贈謚清敏公墓石封在蘇吐谷中麓辰坐之原配星山李氏墓在白虎內砂巽坐之原考忌三月初六日配忌八月十六日子諱信健寧邊府使叅判墓在谷口長衫麓卯坐之原忌三月初九日配順興安氏墓在同壠右邊忌七月十九日子諱允禧仕至正判事墓在同麓牛川邊火城圍築忌五月初四日配達城徐氏墓左邊同原忌正月初三日子諱士英贈叅議即吾先考也墓在高祖考青龍麓午坐之原火城圍築忌正月初七日奴李喆伊守護配密陽朴氏墓在山玉泉錦城麓子坐之原上有觀龍寺奴李卜發守護忌十月初八日來歷與墳山昭載家乘而自始祖以來文蹟亦成卷軸安知其不入賊燼之中乎爲此懼矣雖欲纎悉而精神耗損多所忘了故以若干語記付于李君待汝之成長

癸巳十一月二十二日

 

태학주부공 휘 준 중화에서 귀양 중 달문에게번역문

오호라 내 본디 장연노씨(長淵盧氏)로 영남의 창녕읍에 살았으니 읍의 서쪽 지포면 김천동(金泉洞)은 우리 아버님과 형님의 고택(故宅)이 있고 고택의 동쪽에는 나지막한 기슭이 있으니, 넓은 들판을 만끽하면서 유람할 수 있는 시야가 확 트인 곳이다.

너의 백부의 휘()는 침()이시고 자는 경승(景昇)이며 중진사(中進士)요. 숙부 휘()는 잠()이고 자는 회승(晦昇)으로 생원(生員)이며 문장(文章)과 학행(學行)이 그 시대에 매우 뛰어나 많은 사람 중에 으뜸이셨다.

 

너의 백부께서는 1546(明宗 1) 상지(上至) 3년 선조(先祖)의 음덕(蔭德)으로 진사(進士)에 등제(登第)하고 건원릉(健元陵)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노모(老母) 봉양을 위해 사양하고 그 직에 부임하지 않았고, 학문을 가르치면서 정신을 수양하는 두어 칸 정자(亭子)를 나지막한 산기슭에 세워 만취정(晩翠亭)이라 부르면서 동쪽의 작은 들창은 회려암(回驢菴)이요. 서쪽의 작은 들창은 몽학재(夢鶴齋)라 하였다.

 

내가 집에 머물렀던 것이 겨우 4년, 약관(弱冠)의 나이에 큰형님과 작은형님(伯兄 丙戌生, 仲兄己丑生)으로부터 경전강론을 들으며 갈고 닦으니, 나의 학문이 일취월(日就月將)하였음은 어질고 현명하신 아버님과 형님께서 교훈하여 주신 힘으로 다른 사람이 따라오질 못하였다. 

 

1587(宣祖 20) 정해년 봄 216일 이효남 현감이 와서 주효를 베풀어 놀이할 때 큰형님 시제(詩題)를 쓰고

 

원운(原韻) 하여 가로되

백길 높은 바위 들창을 가리 우고 앞을 바라보니

물안개가 저 멀리 떠 있는 것 같도다

수없이 작은 쪽빛의 산봉우리와 마주 대하는 추녀가 빼어나니

일대의 긴 내는 들을 감싸고 흐르는구나.

술을 들고 노래 읊으며 장한 뜻 품고 정자에 올라 돌아보니

귀밑머리 희끗희끗 헝클어진 머리카락 세월을 더한 것이 부끄럽구나

예쁜 가마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니 학이 하늘을 자유로이 나는 것 같아

어찌 그다지도 소동파 신선의 적벽(赤壁) 놀이와 흡사한가.

 

이효남 현감이 차운(次韻) 하여 가로되

산 넘고 물 건너 먼길 말머리 돌려 들어오니

뉘네 집 정자이기에 그림 같이 뜨 있느뇨

문장의 으뜸은 노 진사요

도학의 연원은 이곡류일세

달은 중천에 이러고  바람에 달빛 실어오니, 그 멋을 알도다

꽃이 피면 잎 떨어지니, 봄 가을을 쓰는구나

평생 우러러보는 참 선비가 여기 있으니

아문을 스스로 나온 내 놀이가 부끄럽구나

 

둘째 형님이 차운하여 가로되

우습다 남아가 백발에 속았으니

하늘 땅 어디에 악양루(岳陽樓)가 떠다니는가

참 장인의 발자취 정주학(程朱學)이 부끄러워하니

도리어 이백과 두보의 놀이와 흡사하구나

물과 달이 아름다워 여기에 몸을 숨겼도다

정자는 작으나 재주를 펼칠 수 있으니 봄 가을을 헤아리니

여럿이 있는 중에 나만 스스로 즐거워하고 있구나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봐도 아득한 곳에 나와 노는구나.

 

내가 차운하였으니

발을 밟고 어떻게 발을 디딜 수 있겠는가

날아서 능히 이르니 뛰어오른 능력이 빼어나네

정자를 지었더니 옳도다,경치와 풍경이 더욱 아름답구나

강학의 요지는 장차 섭렵하니 응용하여 구하도다

의욕이 넘치는 가운데 동정은 보람으로 답하도다

베풀면 편한 세월,어찌 두렵다 멀리하리오

문 앞에서 달라 말고 오로지 우리 나누고 베푸세

고을 어른과 현감의 노래가 찬미하여 퍼지도다

 

향인 모씨(某氏)도 시를 짓고 차운(次韻)하였으나 번거로워서 다 기록하지 않노라.

이듬해 내가 대궐(大闕)에서 경학(經學)으로 강경과(講經科)에서 급제하고 경인년 717일 태학주부(太學主簿)를 제수받고 106일 밤에 일어난 사건으로, 신주(神主)를 모시는 전각(殿閣)에서 향로(香爐)와 향합(香盒)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있었으니, 그때 내가 당직이라서 관직을 삭탈(削奪) 당하고 이곳 평안도(平安道) 중화읍(中和邑) 북부리(北府里)로 귀양살이한 것이 벌써 4년이 되었으니 슬프다.

 

국운이 매우 어려운 국면이고 오랑캐 무리가 날뛰고 병화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쓰러지고 멸망하니, 무엇 하나 남은 것이 없고, 남쪽 땅은 피해가 더욱 잔인하다고 하니, 부모 형제의 생사는 알 수가 없고 분묘마저 모두 훼손되었다고 하지만 누가 나를 위하여 전해 주리요. 째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전해 들은 뒤로부터 애통한 마음이 골수에 사무쳐 병이 점점 심하여 의원이 연명(延命)하기 어렵다 하였다

 

평상시도 천육백 리 머나먼 길을 운구(運柩)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거늘, 지금은 도로가 험하니, 막히고 끊어졌으며 인가(人家)에는 연기가 나지 않고 다 쓸어 버렸으니, 나는 아직 찬바람 신세를 면할 수가 없구나. 길은 끊어지고 멀리 떨어진 이곳 들판에 내 뼈를 버려야 하니 어찌하리오, 몸서리나게 끔찍하여 차마 말을 할 수도 없구나.

 

너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기에 안전하게 보호하여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 멀리 떠나온 이곳에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의지할 곳도 없던 차에 이 마을 이숙(李淑)은 나와 동갑으로 허물없이 지내는 후덕한 사람이고, 또한 급한 사람이 있으면 돌봐 주는 의리가 있으니, 반드시 너를 보호 할 것이니, 내가 죽으면 네가 성장하는 날까지 잠시 의지하여라, 여종 순금(順今)은 너의 어미가 일찍 죽은 후부터 너를 젖 먹여 기른 사람으로 나와 너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항상 자기의 자리를 지키면서 의복과 음식을 정성을 다하여 바친 사람이니 마땅히 어미로 보면 그도 마찬가지로 네가 보는 것 같이 너를 볼 것이다. 이숙(李淑)은 너를 살릴 부처요. 여종 순금(順今)은 깃 속에 알을 품듯 너를 사랑과 정으로 기른 어머니로서 객지에서, 멸망한 집안에서 살아남은 너를 보호하는 것은 초목(草木)의 뿌리를 지키듯 너의 근원(根源)을 지키기 위함이로다.

 

다행히 네가 장성(壯盛)하여 고향 땅에 가거들랑 사촌 형님 충언(忠彦), 홍언(弘彦) 방언(邦彦), 계언(繼彦)과 사촌 동생 종문(宗文)의 거처(去處)를 찾아서 이 아비의 원통함을 말하고, 장차 한 줌의 흙과 썩은 뼈라도 선산 곁에 묻는다면 되살아나는 것과 같으니,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것이다. 만약에 종친들이 난리에 모두 죽었다면 너는 당연히 옛터에 살 만한 땅을 가려서 집을 지어 선조의 덕업(德業)을 받들어 제사를 모시고 사람의 자손으로 문호(門戶)를 보존하여라.

 

우리 집안의 계통(系統)과 선조께서는 어디에서 오셨는지 그리고 선산의 위치를 너를 위하여 대략 말하노라. 우리의 선조는 중국 사람이며, 범양(范陽)의 문별 좋은 집안으로 천하에 명성을 가득 메웠더니, 당나라 조정(朝廷) 덕종(德宗)이 그 지체 높고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종족宗族)의 강성(强盛)함을 싫어하여 사람들을 시켜 노씨(盧氏)와 결혼을 하지 못하게 하니, 천하가 이르기를 산동금족(山東禁族)이라 하였다.

선종(宣宗) 말엽에 시조 휘() ()께서 아홉 아들을 거느리고 동으로 강을 건너 처음에는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 능리(菱里)에 잠시 살다가 두 번째로 용강(龍岡) 상제촌雙梯村)으로 옮겨 살면서 아홉 아들이 다 함께 등과(登科)하고 충성으로 고려조(高麗朝)를 섬기며 적을 물리친 공으로 분봉(分封)을 받아 구읍(九邑)에 봉()해지니 장연백(長淵伯) () ()께서 우리 장연노씨(長淵盧氏) 파의 시조이시다.

 

고려 중엽에 이르러 북쪽 지역 사람들이 살상(殺傷)당하는 소란(騷亂)이 일어나자, 사재시령(司宰寺令) () ()께서 남쪽 경북 청도 상당리(上黨里)로 내려와 운문 산중 신원평(新院坪)에 정자(亭子)를 짓고 이름하여 대비암(大庇菴)이라 부르고 남과 북에 구불구불한 굴 집이 있으니 하나는 소요헌(逍遙軒)이고 다른 하나는 양진당(養眞堂)이니 장차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는 뜻을 가지고 몸소 신원(新院) 들녘 상 중 하에서부터 금정(金亭) 들녘까지 하찮게 여겨 관심이 없는 황폐한 땅을 입안하여 관청에 문서를 제출하여 땅을 소유하고 자작하였다.

 

현종(顯宗) 왕으로부터 덕종(德宗) 왕의 사부로 부르셨으나 사양하고 병으로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왕이 이를 받아들이고 살던 곳의 산천을 나누어 사패(賜牌)하여 주고 가로되

南飛仙鶴入雲門 남쪽으로 선학이 날아 운문에 드니

剩借千峰別有園 수많은 봉우리 빌리고도 또 다른 동산이 있네

淪落當年看斗氣 떠돌아다니는 별 기운을 보니

謾將閒脚躡天根 장차 한가한 다리가 하늘 끝을 밟겠구나 하고 시를 증시(贈詩)하였다. 그 뒤 시령공의 아들 안강부원군(安康府院君) () ()께서 점차 그 땅을 개척하여 일정하게 나누어 승도(僧徒)들로 하여, 대비암과 소요헌, 양진당을 지키게 하였다. 부원군(府院君)의 아들 휘() 명신(命臣)께서 공민왕조 때 정승(政丞)을 지냈으며, 마을로 돌아와 은거하고, 오가며 산각(山閣)을 다스리고 즐기면서 대비암(大庇菴)에다 귀중한 모든 사실을 기록하였고, 그리고 원평(院坪) 길가에 비를 세워 비문(碑文)의 옆면과 측면에는 개략적인 중요한 내용을 기록하고 전면에는 상부(詳符) 7년 갑인년에 입안하여 13년 경신년에 사패(賜牌)한 까닭을 쓰고 후면에는 지순(至順 ) 3년 신미에 개간하여 승려들에게 맡긴 연유(緣由)를 쓰고 지정(至正) 5년 을유에 비를 세운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병란(兵亂)이 지난 후 암자(菴子)는 있는지 없는지, 또한 비석(碑石)은 그대로 있는지 아니면 뽑아버렸는지 어찌 알리요. 시령 공의 묘는 읍() 뒤쪽 5리 즈음 송정(松亭) 곤좌이며 배는 청풍김씨(淸風金氏)요. 묘는 같은 언덕 계장(繼葬)으로 노비 박칠발(朴七發)이 수호하고 정승 공의 묘는 대곡마을 앞 묘좌(卯坐)이고 배는 연일정씨(延日鄭氏)요 묘는 같은 언덕이다. 아들 휘() 국주(國柱)께서는 가환으로 창녕 월미 촌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돌아가신 후 반장(返葬)하여 청도 대곡 아버지 산소 아래 안장, 노비 최승봉(崔承奉)이 수호하고, 시령 공 이하 산소는 정촌(井村) 상당(上黨)리 앞뒤의 뒷산과 안산에 있고,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는 방친(傍親) 금양(禁養)이 수호하고 있으니, 네가 마땅히 가보고 청도 일가들이 급하게 피난하였을 것이니 생사를 알아보아라. 만약에 찾을 수가 없다면 나의 외종사촌(外從四寸) 증경(曾經)이 풍각현(豐角縣)에 살고 있으니 찾아가거라 외종사촌(外從四寸) 증경(曾經)은 일찍이 함안군수(咸安郡守)를 지냈으니, 박함안가(朴咸安家)에서 이어져 온 파계(派系)와 청도의 산소를 너에게 자세히 아르켜 줄 것이니 부디 잊지 말라.

 

정승(政丞) 공의 손자 휘() ()께서는 고려(高麗) 말에 선죽교(善竹橋)의 난을 함께하였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사망하자 숨어 살면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태종(太宗) 원년에 임금이 명하여 부르니, 대궐(大闕) 아래 나아가 소복(素服)을 바꾸지 않고 읍()만 하고 즐기어 절하지 아니하자,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옛 제도를 고치지 아니하고 읍()만 하고 즐기어 절하지 않으니 변소자(抃素子)란 이름이 가하다 하고, 이리하여 노변소(盧抃素)경주부윤(慶州府尹)에 제수하니 출발할 때 시()를 지어 이르기를

保身雖一道 몸을 보전함은 비록 한 길이나

忍負首陽心 차마 수양산(首陽山)의 마음을 버릴손가

圃寒篁碧 들판의 차가운 대숲이 푸르러

待余不改隂 나를 기다려 푸른 그늘을 바꾸지않는구나

부임 수개월 만에 병을 핑개로 인 끈을 풀어 놓고 그대로 떠나왔으니, 개명하기 전의 이름은 참(旵)이며, 자는 회문(繪文)이다. 집에서 별세하니, 대호군(大護軍)을 가자(加資)하고 청민공(淸敏公)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묘는 석봉(石封)이고 소토곡(蘇吐谷) 중봉(中峰) 진좌(辰坐) 언덕이고 기일은 316일이다. 배는 성산이씨(星山李氏)이시니, 묘는 백호내(白虎內) 봉황 언덕 손좌(巽坐)이며, 기일은 816일이다.

 

아들 휘() 신건(信健)께서는 벼슬이 영변부사(寧邊府使)를 거쳐 참판(叅判)에 이르렀고 묘는 곡 어귀 장삼(長衫) 산기슭 묘좌(卯坐) 언덕이 고, 기일은 39이며, 배는 순흥안씨(順興安氏)이고 묘는 같은 산기슭 우변으로 기일은 719일이며, 아들 휘() 윤희(允禧)께서는 벼슬이 정판사(判事)이고, 묘는 같은 언덕 우천변(牛川邊)에 있으며 화성위축(火城圍築)이고 기일은 54일 이며, 배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고 묘는 좌변 같은 언덕으로 기일은 13일이다. 아들 휘() 사영()벼슬이 참의(叅議)이니, 나의 선고(先考)이시다. 묘는 고조고(高祖考) 청민공(淸敏公) 산소 왼편 산기슭 오좌 언덕이고 화성(火城圍築)이며, 기일은 117일이고 노비 이철이(李喆伊), 수호하고 배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니, 묘는 산옥천 금성(錦城) 기슭 자좌(子坐)이고 위쪽에 관룡사(觀龍寺)가 있으,  노비 박복발(李卜發)호하고 기일은 108이다.

 

내력(來歷)과 더불어 산소는 뚜렷하게 가승(家乘)에 실려있고 시조 이래로, 문적(文蹟) 또한 권축(卷軸)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그것이 안전한지 아니면 도둑의 수중에 들어가거나 불타지는 않았음을 알 수가 없으니, 이것이 두려워서 욕심은 자세히 다 기록하려 하지만 정신이 모손(耗損) 되어 지난 일을 똑똑히 기억하지 못하고 많은 것을 잊어버렸으니, 약간의 이야기를 적어 네가 성장(成長)하기를 기다리며, 이숙(李淑)에게 부탁하노라.

15931122일 쓰노라

 

 

  【脚註

池浦里 : 대초면(大招面)과 지포면(池浦面)이 병합되어 지금의 대지면(大池面)이니, 본문의 지포리 김천동은 지포면 김천동으로 바로 잡음

程  子 : 송나라 학자로 정호(程顥), 또는 정이(程頤)의 존칭

朱  子 : 남송의 유학자. 이름은 희(),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吏曹叅判 : 조선 시대에 이조에 속한 종이품 벼슬

주부공 유서 수정보완

유서 게재 내용과 자손록 부분이 경진보(1820), 병오보(1846), 신유보(1921), 을축보(1925)와 병신보(1956), 병오보(1966), 을축보(1985)가 서로 상이하여, 도호공이 직접 전달 받은 주부공 유서와 최초로 발간한 경진보를 존중하고, 이후 발간된 여섯 책을 비교 분석하여, 급번 족보에 인용 수정 보완하여 게재하였습니다.  

資料收集編纂委員會

編輯飜譯觀號 圭星

參考文獻長淵盧氏歷代世譜, 昌寧郡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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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효공 성균관진사(節孝公 成均館進士) 盧 弘 彦